▲노동절 기념예배청주연초제조창 문제 해결과 노동절(근로자의 날) 기념 예배. 1975.3.11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청주의 8개 기독교 단체가 모였다. 정진동이 입을 열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박OO씨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 기독교 단체가 공동으로 서명을 받아 연초제조창에 진정서를 낼 것을 제안합니다."
정진동의 제안 설명에 이의를 제기하는 단체는 없었다. 박씨의 건강 상태와 최근 심경을 묻는 정도였다. 질의응답 이후에 진정서의 내용이 정리됐다. "연초제조창은 국립의료원에서 발급한 박씨의 8년 전 진단서를 찾아내라. 이를 근거로 재해보상과 원호연금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해달라."
참석자 전원이 진정서에 서명을 했다. 자신들이 속한 단체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기로 했다. 1975년 7월 5일 모인 이 단체들은 청주의 기독교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석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청주제일교회(기독교장로회), 청주YMCA, 청주YWCA,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한국기독교산업선교연합회, 예장(예수교장로회) 충북노회 성직자, 기장(기독교장로회) 충북노회 성직자, 청주대학생선교회(청주 CCC)(크리스챤신문. 1975.7.19.)
청주연초제조창 박씨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진정서 작성과 서명운동이 1975년 7월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청주제일교회는 1974년 12월부터, 청주YWCA는 1975년 1월부터 받기 시작했다. 또한 1975년 2월 25일에는 청주CCC, YMCA, YWCA, 청년관(감리교),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1차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즉 1975년 7월 8개 단체의 연합 서명운동은 2차인 것이다.
정진동이 발품을 팔아 기독교 단체에 호소하고 설득한 결과였다. 그는 어떤 문제가 발생해 해결해야겠다고 판단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었다. 한편으로는 청주시장, 야당 총재, 국회의장,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단체를 총망라한 서명을 받았다.
그 결과 충청일보와 지역 라디오방송, 기독공보, 크리스챤신문에 보도됐다. 청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핫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진동은 청주연초제조창 박씨 문제에 왜 이렇게 열심이었을까?
물론 정진동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찾아온 노동자들이 호소하는 문제를 단 한 건도 무성의하게 처리한 것은 없다. 다만 박씨 문제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그가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노동자였다는 점이다.
즉 박씨 문제가 단지 그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봤다. 박씨는 20년간이나 근무한 직장에서 직업병이 걸리고도 일방적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박씨는 가정경제를 책임지느라 나이가 40이 되도록 미혼이었다. 여동생 교육과 결혼을 뒷바라지하고 노모를 모시며 가정경제를 책임졌기 때문이다. 당시 5남매를 둔 정진동 목사가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다.
오해와 누명 사이
정진동의 집요한 활동과 여러 기독교 단체의 연대활동 그리고 언론보도로 박씨 문제의 해결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새로 부임한 청주연초제조창 김윤O 창장이 1975년 4월 2일 피해자 박씨, 정진동 목사, 연초제조창 관리과장을 한 자리에 불렀다. 김창장은 이 자리에서 "박씨는 공상(公傷)으로 인정하고 1급 재해 임금을 받도록 최선을 다해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씨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합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