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머물고 싶은 계절
나의 학창시절은 별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다. 남들처럼 남학생들과 미팅도 한 번 못 해봤다. 선생님들이 가지 말라는 빵집은 왜 그렇게 가고 싶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난다. 남친도 사귀지 못 하고, 좋아하는 남학생한테 대시도 한 번 못 했다. 왜 그렇게 순진했는지 모르겠다. 친구네 과수원에 가서 사과 따주고 놀던 일, 깔깔대며 딸기밭에 갔던 추억들이 있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14살 때 다른 동네 친구 집에서 엄마 허락을 받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했던 남학생이 사는 동네였다.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면서도 남학생한테 얘기도 못 해봤다. 하룻밤을 보내고 이틀째 친구 부모님들이 오시지 않아서 하룻밤을 더 묵으려고 놀고 있는데, 저녁 무렵 엄마와 내 친구와 여동생, 셋이 나를 찾아왔다.
엄마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바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가 "하룻밤을 허락했는데 왜 집에 오지 않고 네 멋대로 놀고 있냐?"고 혼내시더니 "네 마음대로 살아봐. 너처럼 약속 안 지키는 딸은 필요 없다"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기찻길이었는데 엄마는 거기 누우시더니 "여기서 죽을 거다"라며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난 겁이 나서 울면서 엄마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라고. 아마도 엄마는 친구 집에서 놀 때 남학생들과 함께 지낸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평소 엄마는 우리에게 천사 같았다. 항상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며 뭐라도 부족한 것 없이 해주시려고 했다. 엄마는 우리를 평등하게 대해 주셨다.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한 봉 사면 우리 4남매 똑같이 나누어 주셨다. 지금 같으면 학창시절에 미팅도 해보고, 남친도 사귀어 보고, 친구들과 놀러도 다니고 조금은 놀아봤을 것이다. 엄마한테도 지금처럼 전화만 있었어도 자세히 설명하고 허락받아서 엄마를 속상하게 안 했을 것이다.
난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부모님 속 썩이고 마음 아프게 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졸업 후 친구들과 유원지 놀러 갔다가 남편을 만났다. 남편 팀과 우리 팀이 합석하여 함께 놀게 되었다. 남편이 다가와 말하는데 난 처음 만난 군인이라 너무 떨렸다. 당시 그는 의정부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매형하고 놀러 왔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이 들었다. 나는 처음 사귀는 남자라 엄마한테 편지 주고받는 남친이 있다고 모든 걸 다 얘기를 했었다. 편지 내용까지 보여주며 다 얘기했었다.
6개월 지나 제대하고 어느 날, 남편이 우리 부모님을 찾아왔다. 남편은 먼저 엄마에게 인사 드리고 "시내 같이 나갔다 오겠다. 저녁에 아버지를 뵙겠다"라며 허락을 받았다. 시내에서 영화 한 편 보고, 남편이 자기 둘째 누나한테 나를 데리고 가서 인사시켰다. 누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음날 집으로 왔는데 엄마는 화가 많이 나셨다. 엄마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남편이 부모님에게 넙죽 절을 하더니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어머님은 9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님도 17살에 돌아가셨단 것도 얘기했다. 난 그때 당시에는 결혼은 생각 안 했다며 싫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 엄마는 남편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큰아들처럼 생각하겠다며 허락하셨다. 남편이 집에 왔을 때 인상도 나쁘지 않고, 예의도 바르며,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니 마음이 약해지신 것 같다. 나의 인생 2막이 시작된다. 나는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너무 일찍 결혼해 후회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고 싶은 것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금의 나, 너무 좋다.
*연재4-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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