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칼을 목에 찬 수운 최제우 대신사수운 선생은 1864년 1월 20일 대구감영 선화당(宣化堂) 뜰아래서 첫심문이 시작된다. 이때 수운 선생은 큰 칼을 목에 차고 힘겨운 모습으로 끌려와 강제로 무릎을 꿇린다. 그런데 수운 대선생은 형형한 눈빛으로 경상 감사 서헌순, 상주 목사 조영화, 지례 현감 정기화, 산청 현감 이기재 등을 쏘아본다. 이러한 모습을 박홍규 화백이 실감나게 그려냈다.
박홍규
동학, 동쪽의 학문이다
수운 선생의 예정된 심문은 연일 내리던 비가 그치자 1월 20일 본격 시작되었다. 수운선생은 4차례, 이내겸은 3차례, 이정화는 3차례, 강원보는 2차례, 나머지는 1차례씩 가혹하리만큼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심문 첫날에 가장 먼저 끌려나와 대구감영 선화당(宣化堂) 뜰아래 꿇려진 사람은 수운 선생이었다. 심문 직전 이미 경상 감사 서헌순의 주도로, 상주 목사 조영화, 지례 현감 정기화, 산청 현감 이기재가 입회하여 "철저히 밝혀내라!"는 엄명으로 심문이 본격 시작되었다.
이때 수운 선생은 큰 칼을 목에 차고 힘겨운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좌우를 한 번 둘러보곤 쓰러지듯 꿇어앉았다. 이날따라 비가 그치고 청정한 하늘이 드러났다.
심문에 나선 감사, 목사, 현감 등 관리들은 날카로운 눈빛과 쩌렁쩌렁한 소리로 교졸들에게, "죄인 최복술을 형틀에 묶어라!"고 명령을 내렸다. 군아의 장교와 나졸들은 익숙한 솜씨로 재빨리 큰 칼을 씌운 채 형틀에 묶는다. 처참한 몰골로 형틀에 묶인 수운 선생은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려 몸을 꼿꼿이 세운다.
그리고 관리들과 교졸들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에 입회한 관리들은 한 목소리처럼, "저놈의 눈빛이 역적이로다!! 여봐라! 저놈이 고개를 숙일 때까지 매우 쳐라!"하며 소리를 지른다.
교졸들의 심한 매질이 시작된다. 수운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눈빛이 강해 역적의 눈빛이라 놀림을 당했고, 득도 후에는 마치 호랑이 눈빛처럼 강렬하여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수운 선생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호랑이 광채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순간 관리들은 뭔가 두려움을 느끼는 표정을 감추면서 계속 매질할 것을 명령한다.
수운 선생은 거의 초죽음이 될 때까지 혹독한 매질을 당하여 온몸이 피로 얼룩진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본격 심문이 시작된다. 심문관은 수운 선생에게, "죄인 최복술(최제우)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답해라.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하고 묻는다.
답하기를, "나의 아명(兒名)은 복술(福述)이고, 관명(冠名)은 제우(濟愚)이며, 살고 있는 집은 경주의 현곡면 가정리 용담에 있다." 묻기를, "울산에 산다는 소문도 있는데 사실이냐?" 답하기를, "5~6년 전 울산으로 이사 가서는 옷감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근년에 다시 경주로 돌아와 살고 있다."고 하였다.
참관한 관리들은, "어찌 죄인이 경어를 쓰지 않고 꼬박꼬박 반말을 하느냐?"고 호통을 친다. 수운 선생은, "우리 동학은 남녀노소(男女老少) 가리지 않고 존칭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그대들이 함부로 대하고 말하니,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격분한 관리들의 질문이 이어지길, "너는 어찌 당을 모아 풍속을 어지럽히는가. 이미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귀신을 부르고 칼춤으로 공중을 나르고 또한, 토색질까지 했다는데' 사실이냐?"
답하기를,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부득이 만나 주었기 때문에 도당(徒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 붓을 잡고 귀신을 내리게 했거나,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거나, 돈과 쌀을 토색질한 일은 애초에 없었다. 선생이니 제자니 하는 소리도 내가 자칭한 것이 아니다."
묻기를, "그럼 소문과 다르다는 것인가?" 답하기를, "우리 도(道_천도·동학)는 간악한 종교와는 달라서 애초에 숨기거나 속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그럼 무엇으로 생활을 하였는가?" 답하기를, "나는 경주 백성으로서 아이들에게 공부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왔다. 또한 옷감장사와 철점사업으로 생활을 유지해왔다.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돈을 요구한 사실이 없다."하였다.
묻기를, "말이 동학이지 서학과 같은 것이 아닌가?" 답하기를, "내가 의관을 갖추고 행세하는 사람으로서, 양학(서학)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고 옳지 않다. 천도(天道)는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13자 주문(呪文)으로 된 글을 지어서, 동학이라고 불렀는데, 동쪽 나라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이미 다 내가 지은 경서에 밝혀놓았다."하였다.
관리들은 수운 선생의 답변을 막으며, "죄인은 묻는 말에만 답하라, 어찌 여기서 경서(경전) 운운하는가."하며, 사학과 반란에 관련 있는 것 이외 다른 논리나 경전 이야기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수운 선생의 논리에 밀리는 듯하자 일단 심문을 쉬고 관리들은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수운,
자신을 죽이려고
잡아간 자들도
하늘이어라.
수운,
온갖 고문과 매질에도
끄떡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정정당당하게 밝힌다.
수운에게는 삶과 죽음도
오직 하늘과 같아
추호도 두렵거나
염려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육신은 찢어져
죽을 것만 같아도
정신은 불멸의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