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기아바이', 어떻게 생각하세요

승객들, 불만 높지만 단속은 반대...명확한 단속 법령 없어

등록 2006.12.21 14:23수정 2007.01.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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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퇴근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 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려 하는 A씨. 갑자기 옆 칸 통로 문이 '드르륵' 열린다.

"잠시만 승객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아주 멋진 상품을 들고 왔습니다."

지하철 상인이다. 열차에 타면 하루에 1~2번씩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피곤할 때 들려오는 이들의 우렁찬 목소리는 달갑지 않다.

# 2

오늘도 새벽같이 지하철에 나온 B씨. 날이 쌀쌀하고 피로가 풀리지 않았지만, 집에서 쉬고 있을 수는 없다.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후 늦은 나이에 마땅히 할 일도 없었기에 이른바 '기아바이'(지하철 내에서 승객들에게 값싸게 물건을 파는 상인)로 나섰다. 처음엔 쑥스러움과 수치심에 말문도 제대로 열지 못했다. 지금도 지하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접하는 몇몇 사람들의 짜증스런 표정에 아직도 마음이 서늘하다. 승객들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그네들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지하철 이용자 대부분이 겪었을 법한 상황(# 1)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아바이'의 심정(# 2)이다. 지하철에 타면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상인을 만나기 마련이다. 어떨 땐 서너 명의 상인이 연이어 지나가기도 한다.

퇴근시간 전후 복잡한 지하철 내 통로를 비집고 지나갈 때는, 여기저기서 짜증 섞인 탄성이 나오기도 한다. 조용한 지하철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방해꾼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상행위를 금지한다는 안내방송이 무색하게 들린다.

시민들 "지하철 내 상행위 부정적이지만 무조건적 단속은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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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진

필자들은 93명의 시민들에게 '기아바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서울지하철 1호선 외대역을 이용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한 직접 설문과 '디시인사이드'의 한 게시판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을 병행했다.

조사 결과, 약 71%가 지하철 내 상행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시끄럽다'(36.4%)는 의견이 가장 많았고 '통행방해'(27.3%), '저급한 상품'(21.2%)이라는 이유가 그 뒤를 이었다.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의견으로 시민들의 무릎에 물건을 놓고 돈을 낼 것을 요구하는 사실상 '강매'가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와 달리, '좋다'고 답한 사람의 절반 이상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고 그 이유를 제시했다.

김민정(21)씨는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다니는데 칫솔회사 직원이라 했던 분이 다른 때에는 면도기회사 직원이 되기도 하고 혹은 계산기 회사 직원이 되는 걸 보면 재미있다"고 말하고 "그렇지만 지하철에서 책을 보거나 시험공부를 할 때 그런 분들을 만나면 정말 신경 쓰인다"고 덧붙였다.

반면 시민들은 이들을 철저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응답자의 63.4%가 지하철 내 상행위를 철저하게 단속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 중 89.8%는 상인들도 생계를 유지해야 하므로 이들을 무조건 지하철에서 몰아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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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하모니카를 팔고 있는 김정석(가명)씨 ⓒ 윤형훈

또한 필자들은 실제로 지하철에서 상행위를 하는 이들을 만나 현황을 듣고 의견을 물었다.

장갑을 파는 박성수(가명, 45)씨는 "처음에 물건을 팔 때에는 범칙금 때문에 조마조마했지만 활동하다보니 어지간하면 잘 걸리지 않더라"고 말하고 "지하철역 내에서 물건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단속할 수 없기 때문에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전했다.

하모니카를 파는 김정석(가명, 53)씨는 "짜증내는 승객이 많아 가끔은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든다"면서도 "그래도 좋은 상품을 파는 것인데 구걸하는 사람이나 전도하는 사람 취급을 할 때에는 씁쓸하다"며 말끝을 흐렸다.

명확한 단속 법령 없어... 해결책은 허가와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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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진

현재 지하철 내 상행위를 단속할 수 있는 명시적인 법령은 없는 상태. 옛 철도법 89조(무허가기부요청과 물품매매 등에 대한 벌칙)에는 "철도직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차내, 역 기타 철도지역 내에서 기부를 청하거나 물품을 판매 또는 배부하거나 연설, 권유 등 행위를 한 자는 3월 이하의 징역 또는 5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2005년 1월 1일자로 철도법이 폐기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철도안전법에는 관련 내용이 없다. 지하철 내 상행위를 단속할 법령이 없어, 이른바 '기아바이'들에 대해 '인근 소란'이란 명목으로 경범죄 수준의 처벌(3만원의 범칙금 부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 지하철 운영 주체가 이런 상행위를 적정 수준까지 허용하고 나머지는 단속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김순복(49)씨는 "상인들 때문에 지하철이 혼잡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단속을 강화하면 그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느냐"면서 "그 사람들 중 적정 인원의 상행위를 허가하고 그 외에는 단속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서울메트로 홍보실의 강선희(52) 보도차장은 "지하철 내 상행위를 금지하는 명확한 단속 법령이 없는 탓에 상인은 늘어나고 있다"면서, "민원이 많이 들어오지만, 경찰에 단속을 부탁해도 처벌 '법령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강 차장은 "물품매매 등 내용이 빠진 철도안전법을 대체할 법령이 시급한 상황이라 서울시의회에 이 내용을 조례로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고 있다"면서 "국회나 서울시의회에서 이 법안을 조속히 상정해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는 한편, 또다른 보호법을 제정해 상인들의 생계도 보장할 수 있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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