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다루는 사극을 보면 사지를 찢는 능지처참이나 망나니가 나와 칼을 휘두르며 죄인의 목을 자르는 참수형 같은 형벌들이 많이 등장한다. 죄인에게 주리를 틀거나, 쇠를 불에 달구어 몸을 지지는 등의 비인륜적 고문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부분 눈에 볼 수 없을 만큼 잔혹하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형벌은 집행 경우가 매우 드물거나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범죄자들을 어떤 방법으로 처벌했을까?
조선의 형사법, 즉 경국대전의 형전에 따르면 형벌로 인정하는 것은 오형(五刑), 그리고 오형과 함께 부가하는 부가형(附加刑) 밖에 없다. 주리를 튼다거나 몸을 지지는 형벌은 사실상 법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들이다. 법에 명시된 오형에는 엉덩이를 회초리로 때리는 태형과 장형, 관아에 구금하여 노역을 시키는 도형,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는 유형,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형이 있다. 부가형에는 대표적으로 자자가 있다.
태형과 장형은 회초리 크기와 매를 때리는 횟수에서 차이가 있다. 태형은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작은 회초리로 10대에서 50대까지 때리고, 장형은 좀 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큰 회초리로 60대에서 100대까지 때리는 것이다. 먼저 죄인을 형대에 묶은 다음 하의를 내리고 엉덩이를 노출시켜 대수를 세어가면서 때린다. 부녀자의 경우에는 옷을 벗기지 않았지만, 간음한 여자는 예외적으로 옷을 벗기고 집행하였다. 70세 이상 15세 이하인 사람, 폐병에 걸린 사람, 임신한 여자의 경우에는 대신 속전만 받았다.
도형은 오늘날 징역형과 유사하지만, 당시 도형을 선고받은 자는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도형수는 먼저 장형을 기본적으로 받은 뒤 배소로 이동했다. 죄인을 배소로 이송할 때 관리의 부주의로 죄수가 도망가기도 했는데, 이 경우 관리는 죄수가 잡힐 때까지 구금되어 있어야 했다. 복역기간 중에 죄수가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태 50대를 부과하고 3일마다 1등급씩 올리되, 장 100대를 최고한도로 처벌하였다. 15일 이후에 잡히면 언제 잡히건 장 100대를 맞는 셈이다. 죄인이 복역 중 병이 났을 때는 병가를 주어 쉬게 하기도 하였고, 친상의 경우 역모에 관계된 죄인이 아닌 이상, 상을 치를 수 있게 해주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효를 중시했던 조선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BRI@유형은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유형은 도형과 달리 기간이 정해지지 않아 왕의 특별한 명이 없는 한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는 형벌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화나 당쟁 때 주도권에 밀린 자들이 많이 유배되기도 하였다. 배소에 처와 첩은 따라가도록 하고, 부모와 조부모, 아들과 손자는 본인들이 원할 경우에만 허락했다.
유형 중에서도 안치(安置)는 일정한 장소에 격리해 외부출입을 금지하는 형벌로 왕족이나 고관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왕족 가운데 대표적으로 단종과 광해군이 각각 영월과 제주도로 안치되었다. 안치 중에서도 위리안치는 가시나무로 담장을 쳐 유폐하고, 절도안치는 외딴 섬에 격리하는 것으로 일반 유배와 달리 가족과 함께 사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고통스러운 만큼 안치는 왕의 특명이 있을 때만 시행되었다.
한편 유배인들은 배소에서 자유로운 학문연구가 가능했다. 안치가 아닌 경우에는 지방의 학생들이 찾아와 유배인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유배지에서 허준은 <동의보감>을, 정약용은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사형에는 교수형과 죄인의 목을 칼로 베어 죽이는 참수형이 있다. 사형과 관련하여 죄인의 머리, 양팔, 양다리, 몸체를 찢는 능지처참은 대역죄나 친부모 살인 같은 최고의 반도덕적 범죄인에 대해서만 적용되던 형벌로 집행된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이밖에 왕명으로 독약을 마시게 하는 사사,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낸 다음 참형 또는 능지처참을 행하는 부관참시가 있다. 사형 집행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사형 판정을 받은 뒤에도 두 차례 더 재판을 한 뒤, 사형의 확정은 반드시 왕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초복, 재복, 삼복을 거치는 재판과 그 후의 왕의 승인은 억울한 죽음을 최대한 걸러내겠다는 조선 정부의 의지였다.
오늘날의 광복절특사 같은 사면제도가 있을 정도로 조선의 형벌은 그 당시 상황에 비해 너그러운 편이었다. 조선정부는 전쟁에서 이겼을 때, 왕이 즉위했을 때, 왕세자나 왕세손이 책봉됐을 때, 백성들이 풍수해나 가뭄을 겪었을 때, 혹독한 추위나 더위를 겪었을 때 등 국가나 왕실에 축하할 일이나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을 위로해야 할 때 죄인들을 특별히 사면해 주었다.
부가형은 말 그대로 위의 오형과 함께 부가적으로 행해지는 형벌이다. 그 중 자자는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흠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새겨 넣는 형벌이었다. 죄의 경중에 따라 장형 또는 도형을 가한 뒤 자자하였다. 글자는 오른팔에 새기는데 바늘로 글자를 새겨 넣은 다음 먹을 적신 포대로 감싼 뒤 옥에 가두어 씻지 못하게 하였다. 며칠 뒤, 먹이 피부에 배어들면 확인한 뒤 돌려보냈다. 강도에게는 그대로 '强盜(강도)'라고 새겨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숙종 원년에는 팔뚝에 한 자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에 새기도록 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에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자는 영조 때 폐지되었다.
법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지만 관습적으로 행하던 형벌이 있다. 관아에서 주로 행하던 주리형, 낙형과 권문세가에서 주로 행하던 의비형, 비공입회수형 등이 그것이다. 주리형은 사람의 다리 사이에 2개의 막대기를 넣고 좌우로 벌려 고통을 주는 일종의 고문이고, 낙형은 쇠를 불에 달궈 몸을 지지는 고문이다. 이 두 형벌은 주로 대역죄인을 심문할 때만 사용되었고, 영조 때 폐지되었다. 권문세가에서도 노비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 여러 형벌을 시행했는데 그 중 죄인의 코를 베는 의비형과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잿물을 붓는 비공입회수형이 대표적이었다. 이 역시 각각 세종과 영조 때 금지되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조선시대에는 죄인에게 회초리를 때릴 때도 남녀와 노소를 구분하였다. 사형의 경우에도 삼복제를 통해 3차례의 재판을 한 뒤, 왕의 허락을 맡아 집행하였다. 사극을 통해 접하는 능지처참이나 주리형 같은 참혹한 형벌은 부모살인범이나 대역죄인 같이 조선왕조가 중시했던 효와 충을 거스른 사람에게만 특별히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 사례가 많지 않았다. 잔혹한 형벌의 경우에는 영조 때 개혁과정에서 거의 금지되기도 하였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의 형벌은 이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극악무도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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