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화국 '구룡나라', 그곳의 밤은 길었다

[르포] 강남의 마지막 달동네 구룡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등록 2006.12.21 17:09수정 2006.12.2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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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구룡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문.

구룡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문. ⓒ 정준안

12월 18일. 며칠 사이 내린 눈이 얼어 구룡마을(서울 강남구 개포동)으로 올라가는 길이 미끄럽다. 미끄러운 길 한쪽에는 누가 뿌렸는지 연탄재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오르막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안내문이 있고, 양 옆으로 '구룡마을 주민자치회'와 '구룡마을 자치회'라는 2층 컨테이너 박스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자치회관을 지나니 판잣집과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대문도 없이 미닫이 문으로 된 집, 헝겊으로 대충 판자를 덮어 씌운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집집마다 작은 창문으로 빼꼼이 나온 굴뚝에서는 하얀 연탄 연기가 나오고 있다.

저기 간판 없는 슈퍼가 보인다. 가게와 방, 부엌까지 합쳐 10평도 안돼 보이는 슈퍼인데 주인 아주머니와 막걸리 마시는 아저씨 두 분까지 모두 촘촘히 앉아 있었다.

슈퍼 아주머니 "또 감시견 왔구만"

a 구룡마을 모습.

구룡마을 모습. ⓒ 정준안

슈퍼에 들어 갔을 때 주인 아주머니는 연탄 난로에 된장찌개를 데우고 있었다. 아저씨 두분은 700원짜리 비스킷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컵라면을 샀다. 주인 아주머니는 "젊고 모르는 아가씨가 우리 마을에 웬일이냐"고 물으셨고 "연탄 이야기 취재하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결국 또 감시견이 왔구만"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학생은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BRI@대신 막걸리를 마시던 김씨 아저씨와 이씨 아저씨와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김씨 아저씨는 아까부터 술을 드셨는지 이마 끝까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아저씨는 나를 손녀 같다며 과자도 주고, 자신의 옛날 사진도 보여주시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김씨 아저씨는 구룡마을에 사는 것을 한탄했다. 이곳에 자치구 두개(구룡마을 주민자치구, 구룡마을 자치구)인 것 자체부터 잘못됐다고 했다. 강남에 있는 이 마을이 개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구룡마을 자치구장'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렇게 서로 다투다가 결국 두 명의 자치회장이 뽑혔다고 한다. 결국 두 개의 자치회관이 생겼고 계속해서 두 곳은 싸우고 있다.


왜 서로 싸우면서까지 구룡마을 자치구장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저씨는 "우리 마을은 부자니까. 강남 좋은 터에 있다는 이유로 언제든 포클레인 몇 대 가져와서 밀어 버리면 바로 좋은 아파트 들어설 수 있는 부자마을이니까"라고 말했다.

이씨 아저씨 "구룡마을은 '구룡나라'야"


이씨 아저씨는 김씨 아저씨와 함께 술을 드시고 계셨다. 이씨 아저씨의 원래 직업은 기자였고 미국에 유학까지 갔다 오셨다고 하셨다. 이씨 아저씨는 김씨 아저씨와 비밀이야기를 할 땐 일본어로, 나에게 비밀 이야기를 할 땐 영어로 할 만큼 똑똑해 보였다.

아저씨는 이곳을 서울 강남 개포동 구룡마을, 아니 '구룡나라'라고 표현했다.

"여긴 '구룡마을'이 아니라 '구룡나라'야. 우리 해외에 가서 다른 나라 구경하듯이 서울에 뭐 이런 곳도 있네, 이 사람들 불쌍하게 사니까 난 잘 살아야지 이런 생각 하고 스쳐 지나가는 그런 '나라'... 나는 당장 살아야 할 목숨이 달린 집인데 다른 사람에겐 해외 여행지처럼 뭐 신기한 볼거리로 생각하지. 그림 좋은 사진 몇 장 찍어가는 그런 나라."

그 말을 하시면서 아저씨는 "정 우리를 도와주고 싶으면 우리집에 연탄 1000장만 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이야기했을 때쯤 결국 슈퍼 아주머니가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낯선 사람에게 자기네 마을의 우울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슈퍼에서 쫓겨났다. 슈퍼 문을 닫고 나오는데 주인 아주머니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알약이 줄줄이 보였다.

연탄 난로를 피운 슈퍼에 있다 밖에 나오니 꽤 추웠다. 슈퍼에서 몇 발자국 안 갔을 때 일을 마치고 오시는 듯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인사를 했고 "연탄 피우는 사람들 이야기 듣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했다.

"연탄? 이 마을이 2700가구 정도 되니까 한 80% 정도는 피우는 것 같애."

80%. 그럼 나머지는 기름보일러를 트는구나 생각했다. 그럼 할머니에게 연탄 이야기를 좀 더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할머니도 연탄 피우시냐고 물었다.

"난 연탄 안 피운 지 3년 넘었어. 할아버지랑 나랑 둘이 사는데 연탄 값도 오르고 해서 안 피우고, 기름도 안 때고... 그냥 뭐 참으면서 살어."

할머니 옆집 아저씨가 연탄을 피운다며 슈퍼에서 얼마 멀지 않는 이발관으로 데리고 갔다.

연탄이 유용한 그곳

a 이발관 아저씨의 모습.

이발관 아저씨의 모습. ⓒ 박수정

좁았다. 이발관이라고 해도 손님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딱 한 곳뿐이었고 이발관 벽에는 이것저것 낙서가 되어 있었다. 아저씨는 20년 동안 혼자 이곳에서 이발관을 했으며 3년 전 중풍이 걸려 쓰러지고, 또 한 번 더 쓰려져서 지금처럼 말도 더듬게 되었다고 했다.

"젊었을 땐 노래도 많이 부르고 노래방도 많이 갔는데 요즘엔 노래도 재미없어. 이발관도 2년 전부터 문을 닫아서 손님도 없지. 하루 종일 혼자 TV만 보는데 드라마도 뉴스 같은 건 재미없고 그냥 인간극장 같은 것만 보고 있어."

내가 연탄 이야기를 하자, 아저씨가 그럼 연탄 가는 것을 직접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원래는 지금 연탄 갈 시간은 아니지만 학생이 왔으니까 보여준다고. 아궁이에는 연탄이 두 개 들어 있었다. 하나를 빼고, 신문지를 또 마구 넣고, 다른 새 것을 넣었다. 연탄 연기가 방안에 자욱하게 깔렸다.

아저씨는 방금 꺼낸 연탄재를 집게로 들어다가 밖에 '연탄재 버리는 곳'에 버렸다. 원래보다 이르게 연탄을 갈아 끼운 탓에 연탄재라 해도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연탄재 버리는 곳에서 아저씨와 연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때 아까 간판 없는 슈퍼집 아주머니가 오셨다.

"아니, 이 아저씨가 왜 이 연탄을 버리셨대? 써도 3시간은 더 쓰겠구만. 그러다 여기 불나면 어쩌려고!"

아주머니는 이발관 아저씨를 나무라셨고 아저씨는 무시하는 척 이발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도 이발관 아저씨를 따라 들어갔고 얼마 안 되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왔다. 그런데 아까 그 슈퍼 아주머니가 '연탄재 버리는 곳'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언제 가져왔는지 집게로 아까 그 '3시간을 피울 수 있겠다'던 연탄을 집어 슈퍼로 들고 가셨다.

구룡마을에는 밤이 일찍 찾아든다

a 연탄난로와 연탄.

연탄난로와 연탄. ⓒ 박수정

이제 집에 갈 준비를 하며 마을 입구 쪽으로 걸었다. 가는 길에 컨테이너 집에서 나오는 한 중학생을 만났다. 새싹공부방에서 공부하는 중학생 2학년 친구였다. 수녀님이 오셔서 여기 새싹공부방에서 공부를 무료로 가르쳐 준단다. 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이고 초등학생도 함께 공부한다고 했다. 학생은 20명 정도가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아까 김씨 아저씨가 말했던 구룡 자치구 사람들이 궁굼해져서 회관에 들어가보았다. 회관은 이층 건물로 계단이 있었고 대문이 크게 있었다. 문을 열었다. 연탄 난로는 없었지만 훈훈했다. 얼마나 따뜻한지 유리창엔 하얗게 손가락으로 낙서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두 사람이었고, 방의 왼쪽에는 사무용 책상들, 오른쪽에는 피시방처럼 칸막이로 된 컴퓨터들이 있었다. 특별한 것을 묻지 않았다. 그냥 구룡마을에서 나가는 버스가 몇 번이냐만 묻고 대충 분위기만 살폈다. 나와서 내려가는 계단 옆에 보니 소주 빈 병 20개, 비타500 빈병 10개 정도 곱게 서있었다.

이제 구룡마을은 진짜 어두워졌다. 가야 할 때다. 서울에서 연탄을 피우는 사람들. 이씨 아저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연탄 한 장이 우리에겐 당장의 치열한 삶이라고. 그리고 '달동네'라는 단어가 너무 예뻐서 야속하다고도 했다. 우리의 당장의 치열한 '삶'이 남들에게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구경거리'가 되고 '불쌍하게 사는 그들을 보니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는 말을 들을 때 정말 서울에서 떨어진 '다른 나라'에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구룡마을은 가로등도 없이 깜깜했다. 가로등보다 교회의 빨간 십자가 불빛이 더 많아 보였다. 이곳은 밤도 일찍 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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