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시사저널 불법 제작 중단 촉구 기자회견'이 <시사저널> 노조원과 언론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오마이뉴스 권우성
나는 '짝퉁 <시사저널>'에 대한 첫번째 릴레이 기고문에서 '복사용지 사오는 편집장'으로 잠깐 등장한다. 필자인 서명숙은 그 장면이 꽤나 인상에 남았던 모양이지만, 나는 1998년 3월의 꽹과리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당시에는 최원영 회장이 경영하던 모든 기업이 파산하고 <시사저널>을 제외한 다른 잡지, 그러니까 TV저널과 객석 등이 문을 닫았다. 잡지 폐간으로 하루아침에 퇴직금도 없이 길거리로 나앉게 된 자매지 식구들은 건물 복도를 오르내리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꽹과리 소리는 '너만 살자고 편하게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있느냐'는 질타처럼 귀청을 때렸다. 꽹과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그들과 마주칠 것이 두려워 화장실에도 가지 못했다.
<시사저널>의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차츰 후배 기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내게 찾아와 "우리도 제작 거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때 나는 편집부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9년 전,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던 <시사저널> 발행
@BRI@내가 굳이 9년 전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때의 내 답변과 지금 '짝퉁 <시사저널>'을 만들어내고 있는 회사 측의 논리가 겉으로는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결호 없이 계속 나와야 한다. 주간 잡지가 한 주를 거르는 것은 독자를 배반하는 행위이며, 정상적인 발행이 중단되는 순간 <시사저널>은 사망 선고를 받게 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현재 시사저널 편집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금창태 사장이 같은 논리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9년 전 우리는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일 자체가 고통이었다. 나부터가 손을 놓고 싶었다. 그것이 차라리 편한 길이었다. 아직 젊으니까 호구지책이야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시사저널>이라는 매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나하고 결혼한 거야? <시사저널>하고 결혼한 거야?" 아내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일에 빠져지냈던 10년 세월이 흔적도 없이 뭉텅 지워져버릴 판이니, 오기로라도 <시사저널>을 지켜내야 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 시사저널은 숱한 곡절을 헤치며 지금의 오너인 심상기 회장에게 인수되었다. 그 과정이 길고도 험했던 것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시사저널>이라는 제호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셈법 때문이었다.
가격 협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우리가 끝까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은 TV저널 등 폐간된 잡지의 기자들을 포함한 직원들의 퇴직금이었다. 오기로 버틴 끝에 우리는 <시사저널>도 살리고 꽹과리 소리에 빚진 부채도 갚을 수 있었다. 내가 시사저널의 '결호 없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짝퉁 <시사저널>'의 계속 발행은 시사저널과 그 식구들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넣는 길이다. 내가 한 입으로 9년 전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사실은 나는 일관되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제는 과거 그 어느 <시사저널>보다도 유명해진 <시사저널 899호>는 나와 선후배 동료들이 지켜온 그 <시사저널>이 아니다. 전국 수만 명의 독자가 매주 3000원을 기꺼이 지불하며 구독하는 그 <시사저널>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결호 없음'이 오히려 수치스럽다.
지금 발행되는 <시사저널>은 그 <시사저널>이 아니다
내 주변에는 기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짝퉁 <시사저널>에 불쾌감을 나타내면서도 결국은 파업을 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사태를 맞은 것 아니냐며 '기자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 자신도 지난 연말 후배들이 조심스럽게 파업 이야기를 들먹일 때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6개월 전 삼성 기사 삭제 사건이 났을 때 나는 이미 <시사저널>을 떠나 있는 바깥사람이어서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금창태 사장과 편집국 기자들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응원했다. 지금 생각하니 시사저널에 대한 애정과 미련이 그처럼 헛된 기대와 낙관을 품게 한 모양이다.
나는 금창태 사장과는 기자로서 함께 일해본 적이 없다. 그는 내가 2년 남짓 미국에 가있는 동안에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따금 국제전화를 걸어 편집국 사정을 듣자하니 편집국 간부들과 금창태 사장 사이에 대화가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그러려니 했다. 사장과 편집장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는 것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가 좀 지나친 듯했지만 금창태 사장과 직접 부딪힌 적이 없기에 나는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