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이용승객들(자료사진)오마이뉴스 남소연
옛날부터 '멀미하는 사람은 기차 타면 멀미를 하지 않는다더라'는 말을 먼저 들어두어 멀미는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휘발유 냄새 한 방울도 나지 않는 기차가 멀미 방지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기차만 타면 내릴 때까지 옷매무새도 말끔하게 그대로였고, 기운이 쑥 빠져 다 달아나 버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칠남매 중 장남이셨고, 대구에 사시는 고모는 아버지 바로 아래,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큰 어른이셨다. 자리에 걸맞게 고모는 무척이나 무서운 분이셨는데, 고모 앞에 서면 한껏 주눅부터 먼저 들어 묻는 말에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1년이면 한두 차례 고모 댁으로 가는 나들이가 나를 들뜨게 했다. 그 이유는 기차를 탈 수 있고, 고모 댁에 가는 날만큼은 엄마의 인심이 푸근해져 갖가지 먹을거리들을 잔뜩 준비해 가곤 했기 때문이다.
부산의 명물 자갈치 시장에서 사다가 손수 장만해 혹시 변할새라 스티로폼 상자 안에 꼭꼭 여며 넣어둔 갖가지 횟감들과, 세 명의 고종사촌 언니 오빠들에게 줄 과자며 간식거리들이 기차여행 내내 나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트려 버리기에 충분했으므로, 고모 댁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또 다음번의 여행 길을 기다리곤 했을 정도였다.
무서운 고모를 뵙는 일만 아니라면, 기차를 타고 고모 댁을 다녀오는 일은 언제든 얼마든지 더 해보고 싶은 바람으로 마음속 한켠에 조용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얼마쯤의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있었던 기차여행에 대한 동경은, 십대 시절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이따금 실천하는 자의 감흥을 맛볼 수 있게 해 주곤 했다. 학교를 가지 않는 휴일날 아침이면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서 한번은 대구까지, 다음번에는 대전까지도 기차를 타고 오고 가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가슴이 답답할 때, 어디론가 무작정 가 보고 싶은데, 돌아올 것이 겁이나 용기 나지 않을 때면 가장 먼저 기차를 떠올렸던 것 같다. 대구까지 갔다 오던 날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동대구역 근처에서 잔치국수 한 그릇 말아먹고는 그 길로 되돌아 내려오기도 했다.
기차는 정해진 길로만 달리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고, 아무리 오래 타고 달려도 멀미나지 않아 좋았고, 약속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종착역인 부산역에 나를 내려주기 때문에 탈선할 염려가 없어 안심이 되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세상이 봄에서 여름을 지나 가을, 그리고 겨울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열에 들떠 자라는 사춘기 시절, 한없이 길게 곧게만 뻗어 있는 철로는, 쭉쭉 뻗어나가고 싶은 미래에 대한 열망과 동시에 탈선의 두려움을 일깨워 주곤 했었다.
새벽 기차를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의 맛
나는 그저 기차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기차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주변환경들 또한, 비릿한 쇳내 또한 마음을 설레게 하는 요소들이다. 이른 아침 날이 채 밝아지기 직전 기차를 기다리며 마셔보는 한 잔의 커피는, 그것의 향은 뭐라 설명해 낼 수 없는 고귀한 멋이 그 속에서 전해진다. 나중에 다 자라서는 아직 덜 깨어 차가운 역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파 기차를 타러 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곧 다시 돌아올 것이면서도 떠나는 자의 씁쓸함이 가미된 커피의 맛과 향이라니, 축축한 쇳내 맡으며 마셔본 커피 맛이 이제껏 중에 가장 으뜸이라 한다면 나의 오버가 좀 심한 것인가? 하지만 정말 끝내주는 맛임에는 분명하다.
어렸을 적 대구 고모 댁에 갈 적에는 통일호를 타고 다녀왔었는데, 혼자 무작정 집을 나섰을 때에는 통일호 열차를 타는 가격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무궁화호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사람 사는 살림살이에 조금씩 인심이 베풀어지면서 넉넉하게 세상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큰 마음을 먹고서 서울행 기차를 탔었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둔치에 신문지를 깔고 또 덮고서 한동안 누워있다 다시금 일상으로 되돌아 온 것이 혼자만이 누려본 여행의 마지막이었다. 풋내기 짝사랑을 인제 그만 마음 안으로 깊이 숨겨놓자 결심한 후 제법 멀리 나가 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곧 취직이 되었고 이제는 밥벌이를 해야 하는 어쭙잖은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당분간은 혼사 호사를 누리며 살아도 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취직을 해서 한동안은 기차역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했다.
학비를 내면서 배우러 다니는 학교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니는 직장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이따금 푹푹,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없이 답답함을 큰 숨으로 대신해 가면서, 묵묵히 뚜벅뚜벅 그저 앞만 본 채 걸어가기만 했다. 더디고 지루했고, 견뎌야 하는 마음이 군데군데 숨어 나를 힘들게 했다.
"서울 출장? 저요! 저!"
그 때만 해도 지금처럼 인터넷이 막강파워를 자랑하지 않고 있던 때였던지라, 대기업의 수금처리는 직접방문으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 특히나 인천과 서울 쪽 대기업에 납품업무를 맡아 진행하고 있었던 우리 회사는 그래서 한 달이면 한두 번 수금 업무를 목적으로 출장을 나가곤 했다.
소기업의 특성상 한 사람이 전담해 맡아봐야 하는 업무량이 많았고, 우리 회사에서는 영업담당 대리님 혼자서 납품에서 대금결제까지 전부 관리하고 계셨는데, 단지 수금만 하기 위해 하루를 꼬박 출장에 써버리는 일은 회사 쪽에서도 낭비였고, 대리님 자신도 꽤 지루해하고 계시던 참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하루에 열 시간 가까이 기차와 전철들을 번갈아 타며 길 위를 서성댄다는 건, 목적이 여행이 아니라면 지루하고도 또 지루한 일임이 분명한 것이다.
작정을 한 것은 아니었고, 어느 날인가 그저 지나가는 말로 "수금은 제가 갈까요?" 해보았던 것이 그만 그 다음부터의 수금업무 담당이 나로 바뀌어 버리고 만 것이다.
신나는 일이었다. 한 달이면 한두 번 그것도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서(그때만 해도 KTX 열차가 없던 때였으므로 새마을호가 최상급 열차였다) 실컷 여행 겸 일을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아침 7시 정각에 출발하는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서울을 향해 가면 오전 11시 30분이 채 되기 전 서울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목적지가 인천이라면 서울역 앞에서 전철을 이용해 인천으로 가면 되었고, 목적지가 서울시내였다면 안 닿는 곳 없이 곳곳마다 다 닿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일을 속시원하게 마무리 짓고 오후 열차를 이용해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하면,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고, 먼 길에서 돌아오는 여식이 걱정스러운 엄마의 마중이 역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출장을 다니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직장을 다녔다. 하루해가 지루해 안달을 하던 예전에 비해, 출장이 잦아지게 되면서부터는 한 달이 눈 깜짝할새 흘러가 버리곤 했다. 수금해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곧 다음 수금일자가 다가오는 듯했고, 또 기다렸다.
새마을호 기차를 기다렸고, 역 광장에서 마시는 한잔의 뜨거운 커피를 기다렸고, 플랫폼에서 풍겨져 나오는 비릿한 쇳내를 코 안 가득 담아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미스 김, 사주에 역마살 있다고 안 그러던가? 어째 그렇게 나다니는 걸 좋아해?"
서울 가는 전날이면 유난히 더 부지런을 떨며 일을 하는 나에게 사장님은 가끔 이런 우스갯소리를 던지곤 하셨다. 곧게 뻗어 있는 철로를 따라 하염없이 달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후련하게 속이 뚫리는 느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없이 넓고 깨끗한 하늘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기분좋게 해 주는지에 대한 마음을 곧이곧대로 다는 설명을 해낼 재주가 없었기에, 그저 웃고만 말았던 기억이 난다.
역으로 마중나오는 사람은 바뀌었지만...
조금씩 세월이 지나면서 늦은 밤 돌아오는 나를 마중 나오는 사람도 바뀌어 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출렁이는 양동이를 인 채 여식을 마중 나오곤 하던 엄마에게서 배턴을 이어받아 이제는 남편이 때로는 음악 CD를 들고서, 때로는 베스트셀러 도서 한 권을 들고서 있다 내게 건네곤 했다. 무사히 잘 돌아와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선물이라고 남편은 말했던 것이다.
첫 아이를 가지면서 눈물 나게 행복하게 누렸던 기차여행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리고 곧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세상 덕분에 지금은 모든 업무를 사람의 손과 발이 아닌, 인터넷이 제대로 다 처리를 해 주고 있었다. 7년 만에 다시금 복직을 하고 보니 이렇게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수금차 출장'이란 업무가 불필요하게 되어버린 세상이 온 것이다.
이제는 새마을호가 아닌 부산-서울간 겨우 2시간 30분이면 도착하고도 남는 꿈의 기차 KTX가 달려대고 있는데 말이다.
이제는 서울에 출장을 가도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사무실로 다시 들어올 수도 있게 되었는데, 그만 컴퓨터 인터넷이 이 모든 행복거리들을 빼앗아가버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1년에 한두 번, 가뭄에 가는 콩줄기 올라오듯 서울로 향하는 업무일정이 발생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번쩍번쩍 들고 또 드는 것이다.
"저… 저… 또 역마살이 도지나 보다." 사장님의 핀잔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잘 할 수 있습니다"를 외쳐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커피와 비릿한 쇳내음과 가는 길을 되짚어 처음 출발한 이 곳으로 나를 고스란히 데려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는 한, 한 가지를 더해 반나절이면 서울과 부산을 오고 갈 수도 있게 발빠른 KTX가 달려주는 한 나의 역마살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기차여행에 대한 열망으로 오늘도 나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혹시나 싶어 시작했다가 역시나로 되돌아 오겠지만, 또다시 혹시나 싶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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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저요! 저요!"... 기차는 역마살을 싣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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