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에서 보는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포항에서 단양까지 기차를 타고

등록 2007.06.07 19:11수정 2007.06.0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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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단양에 다녀왔다. 단양까지 간 건 순전히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단양에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기차가 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 전 날 대학 동기들을 만난 자리에서 단양이 고향인 친구 녀석이 집에 간다고 했다.

"그럼 기차타고 가겠네?"

워낙 날 잘 아는 친구라 그 한마디만 듣고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았는지 "너도 갈래?"라고 친구가 물었다. 고민한 시간은 한 10분 정도 됐을까? 나는 금세 좋다고 했다.

충동적으로 오른 단양행 열차

일 년 전에도 친구 따라 단양에 간 적이 있다. 그땐 지방이 고향인 친구 넷이 모여서 일종의 홈 투어를 계획한 것이었다. 돈이 없는 학생인지라 여행을 하고 싶어도 꿈만 꾸어야 했던 우리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집을 방문하면 일단 숙식이 제공되니 여행에 드는 비용이라면 교통비가 전부일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아쉽게도 여행 가는 당일 한 친구는 병이 나서 함께 하지 못했고 우리의 여행 장소도 세 군데로 줄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우리 집인 포항이었는데 서울에서 포항까지 가는 기차 편은 불편해서 버스로 가기로 했다. 세 명 모두 기차가 그리웠던 터라 포항에서 단양까지 갈 때는 아무리 차편이 불편해도 기차를 타기로 했다. 포항에서 단양까지는 두 번이나 기차를 갈아타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일단 경주로 가기 위해 포항역에 갔는데 막 경주 가는 열차가 떠난 후라 우리는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 점심시간도 가까워지고 해서 점심이나 먹자며 역을 나섰다. 고등학생 시절엔 포항역 앞에서 도시락도 까먹고 어른들 몰래 술도 마시고 했던 생각이 나서 도시락이나 사다 먹을까 했는데 겨울바람이 무서운 12월이라 바람 탓에 밖에선 눈도 뜰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분식점에나 들어가 배만 채우고 경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포항에서 경주로 가는 기차는 통근 열차라 지하철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다른 기차에 비해 작기도 해서 장난감 기차를 연상시킨다.

시장통 같았던 비둘기호

문득 비둘기호가 생각났다.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였는데 비둘기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는 없어지기 전에 타보자며 친구들이랑 뭉쳐서 기차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밤새도록 기차 안에서 잠을 자고 나도 아직 서울에 도착 못 했을 정도로 비둘기호가 느리다는 말을 아빠한테 듣고 막연히 비둘기호에 대해 동경심을 품었을 때였다.

밤에 열차를 타는 것도 꽤 낭만적으로 들렸고 밤새 기차를 탈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밤 열차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늦은 시간 열차를 선택해 탔다. 정확히 어디까지 갔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그 기차 안의 풍경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진한 녹색에, 앉으면 머리 위까지 등받이가 길게 올라와 있는 좌석, 좁은 통로, 생선 비린내 같은 이상한 냄새, 자기보다 더 큰 짐을 지고 올라타는 할머니들. 꼭 시장통 같았다.

그래도 왠지 그것이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해서 어린마음에도 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필 겨울에 타서 무척이나 추웠다는 게 딱 한 가지 후회되는 일로 기억된다.

기차여행의 묘미는 역시 삶은 계란

경주에 도착한 뒤 이번엔 안동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다. 경주에서 안동까지 가는 기차는 하루에 몇 대 없어서 도착하자마자 탈 수 있는 기차는 없었다. 이왕 경주에 온 거 그 유명한 황남빵이나 몇 개 사먹으면서 기다리자며 경주역을 나왔다.

역 주변이니 경주 특산품인 황남빵 정도는 쉽게 찾으려니 했는데… 웬걸, 우리는 역 주변을 몇 바퀴씩이나 돌고 돈 후에야 겨우 황남빵 맛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어렵게 얻은 황남빵은 그것을 찾는 노고에 비해 별로 맛이 없어 조금 실망감을 안은 채 안동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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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 앞. 힘들게 구한 황남빵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경주는 곳곳에 탑이 많이 있는데 역 앞에도 역시 작은 탑이 하나 있었다. ⓒ 박은교

경주에서 안동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황남빵을 찾느라 힘들었는지 우리는 타자마자 몇 분은 신나게 졸았다. 깨어나서는 배고프다며 지나가는 이동판매대를 붙잡았다. 역시 기차여행의 묘미는 삶은 계란에 있다. 요즘은 그냥 삶은 계란도 아니고 맥반석에 구워 노릇노릇한 구운 계란이 있다. 마치 햇볕에 살을 보기 좋게 태운 색깔마냥 구운 계란도 딱 그런 색이다. 이런 계란은 딱 두 군 데서 먹으면 제 맛이다. 한 군데는 찜질방, 또 한 군데는 기차 안. 우리는 제 각각 의자 한 쪽에 계란을 톡톡 부딪쳐 까먹었다.

안동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진 탓도 있었지만 꽤 오랫동안 기차를 타기도 했다. 다행히 단양까지 가는 열차는 금방 있었다. 이미 피곤한 상태였지만 곧 단양에 도착한다는 기대감도 있었고 밤 열차의 낭만에도 푹 빠져서 잠은 오지 않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밤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서울이었다면 이 시간에도 화려한 네온사인과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번쩍번쩍하는 야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아름다운 야경이지만 기차 안에서 창을 통해 보는 고요한 시골 야경은 그 어떤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때 맞춰 눈까지 내려준다. 나는 눈이 빛난다는 것을 그때 처음 내 눈으로 확인했다. 깜깜한 밤하늘에 마치 별이 내리는 것처럼 눈이 내렸다. 기차 안엔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해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순간 세상에 나 혼자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단양 친구는 서울에서 단양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남한강을 배경으로 한 야경이 일품인데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맞이하는 눈과 차가운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기차에서 내다 본 남한강 야경

일 년만에 다시 탄 단양 가는 기차에서 본 야경은 그때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지만 지친 내 마음을 달래주기엔 충분히 아름다웠다. 거기다 그때는 못 봐서 아쉬웠던 남한강 야경을 이번에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백번 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저거야, 저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야경."

길게 뻗은 다리 위로 차가 몇 대 지나가고 그 다리에서 내리 쬐는 빛이 다시 남한강에 반사되어 빛난다. 하늘에서 내린 별빛도 남한강에 내려가 있다. 멀리 보이는 단양은 동그란 모양에 산과 남한강이 울타리를 치고 있는 것처럼 생겨서 작지만 안정감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는 그 야경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밤에 집에 내려간다고 했다. 우리는 농담처럼 저 야경을 작은 유리 상자에 담아서 보관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도록.

하지만 지금 보는 이 야경만큼 유리 상자의 야경이 아름답지는 못할 거란 걸 우린 둘 다 알고 있다. 기차 안에서 보는 야경이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기차라는 특별한 공간이 주는 낭만과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그 순간을 함께 한다는 낭만이 있기 때문일 테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

덧붙이는 글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
#기차 #포항 #단양 #안동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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