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운도계단·화살표계단... 산동네지만 계단은 명품!

[미니벨로 타고 서울골목여행 25] 성곽 옆 마을 삼선동, 계단 구경하는 재미 '쏠쏠'

등록 2008.04.13 12:38수정 2008.04.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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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옆 동네 삼선동. 길을 오르다 보면 자연스레 하늘을 보게 된다. ⓒ 김대홍


만화나 영화를 보면 벽 하나를 통과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경우가 있다. 어린 시절엔 벽장이 그런 곳이라 생각해서 벽장 안에 들어가길 두려워했다. 갑자기 다른 세계가 나타나 다시는 지금까지 살던 세상으로 못 돌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 어린 시절을 떠올려준 게 낙산성곽과 서울 성북구 삼선동이다.


아뿔싸! 다른 세상이었다

2002년 6월 12일 문을 연 낙산공원은 새로 단장한 느낌이 물씬 드는 공원이다. 공원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번화한 대학로와 동대문 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대학로를 즐겨 찾는 편이었는데, 2004년 우연히 낙산성곽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산책하기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꼭대기에 서니 작은 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삼선동 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갔다. 아뿔싸. 다른 세상이었다.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 세월이 잔뜩 묻어있는 기와지붕과 시멘트벽.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나중에 시간 내서 꼭 둘러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선 훌쩍 4년이 지났다. 대학로와 낙산에서 사람 만날 일이 잦았지만 삼선동에 발길이 닿진 않았다. 무엇보다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던 내게 가파르고 길 좁은 삼선동은 관심 밖이었다. 그동안 주로 한강 본류와 지천, 자동차가 드문 산길을 찾아다녔다.


같은 곳을 반복해서 달리다 보니 좀더 빠르게 달리고 싶었고, 좀더 멀리 가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서울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저곳 많이 다녔다고 했지만, 지도를 펴놓고 보니 안 가본 곳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시작한 골목여행. 시작할 때부터 삼선동은 꼭 가보리라 계획한 곳이었다. 단 여러 번 소개된 곳이라 차일피일 미루던 차였다. 가고자 했던 동네를 하나씩 둘씩 지워나가다 마침내 삼선동이 남았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한 번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돌았다. 낙산성곽 꼭대기에서 본 동네 풍경은 여전했다. 서쪽은 말이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린 순간 영화 <딥 임팩트>가 떠올랐다. 따닥따닥 집들이 붙어있어야 할 자리는 공터가 됐고 건설장비가 열심히 공사 중이었다. 몇 번 갔던 '낙산냉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층아파트가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삼선동에도 변화가 시작됐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삼선동 속살 모양은 어떠할까.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옥상 가득 꽃 키우는 아저씨 "흔한 꽃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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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공원 꼭대기 성곽 옆에 난 조그만 문을 지나면 바로 삼선동이다. 2004년 찍은 사진이지만 지금도 똑같은 모습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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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 가득 꽃을 키우는 아저씨. 흔한 꽃이 제일 예쁘단다. ⓒ 김대홍



삼선동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혜화문(서울 4소문 중 동쪽에 있는 문, 동소문이라고도 한다) 밖 동소문동, 동선동 일대 들판을 삼선평(三仙坪)이라 한 데서 비롯했다.

삼선동에 가기 위해선 한성대역에서 가는 게 제일 빠르고 혜화역에서 낙산성곽에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방법이 있다. 보문역에서 내려도 그다지 멀지 않다.

가장 좋아하는 방식은 혜화역에서 내려 낙산성곽에서 아래를 보고 내려가는 길이다. 전혀 다른 세상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마술의 문' 같은 성곽 문을 통과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문 앞엔 항상 개 두 마리가 노곤하게 잠을 자고 있다. 2004년에도 그랬고, 가끔씩 낙산 성곽에 올라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찾았을 때도 여전했다. 사람을 보고 짖지도 않고, 부산하게 돌아다니지도 않는 개 두 마리는 개발 흐름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던 동네를 상징하는 듯하다. 성곽 문을 나서면 동네 윤곽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몇 발자국 옮겼는데 골목길 쪽에서 눈길을 붙드는 장면이 있다. 옥상 가득 화분이 가득했다. 모두 비닐이 입혀진 상태라 흡사 포장이사라도 가는 모양새였다. 움직임이 있어 살펴봤더니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열심히 화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름은 문동현(63)씨. "이사하려고 비닐을 씌워놓았느냐"고 무식을 드러냈더니, "보온 때문"이라고 친절히 말한다. 꽃을 들여다보는 표정이 행복하기 그지 없다. 집에 있는 화분은 모두 3천주. 옥상뿐만 아니라 마당에도 화분 가득이다. 심지어 안방까지 화분이 들어차 있다.

이름은 모르지만 들이나 산에서 흔히 봤던 풀이나 꽃들이다. 관상용으로 산 꽃이 아니었다. 문동현씨는 "모두 주변에서 갖고 온 것으로 외국산은 하나도 없다"고 설명했다. "보통  관상용 꽃을 따로 사는 편인데 독특하다"고 말했더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 좋다"면서 미소를 짓는다.

마당을 흘깃 봤더니 개가 몇 마리 있다. 두 마리인가 봤더니 네 마리나 된다. 모두 누가 버린 것을 주워서 기르는 것이란다.

"불쌍해서 그냥 못놔두겠더라구요. 하나씩 둘씩 가져다 기르다보니 벌써 네 마리나 됐네요."

한참을 감탄해서 보고 있으니 5월에 오라고 말한다. 그 때 꽃이 피면 무척 예쁘다면서.

'꽃집 구경'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유난히 꽃이 눈에 많이 띈다. 화분이 많은 것은 골목동네 특징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삼선동은 꽃과 어울렸다. 어느 집은 창문에 꽃스티커를 붙였다. 낙산 중턱엔 어느 벽에 꽃그림을 그려 놓았다. 욕조화분도 있다. 원래 물을 담았던 그릇이니 화분으론 제 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국수전문집은 가게 안 벽에 꽃을 그렸다. 작은 탁자 세 개가 전부인 조그만 식당이지만 꽃그림 때문인지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꽃은 어디 피어도 좋다. 산이나 들에 피어도 좋고 계단이나 벽에 피어도 좋다. 꽃을 보면 마음이 화사해진다.

계단에 설운도·송대관·태진아 그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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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동에 있는 화살표 계단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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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앞 아이들. 골목에선 아이들이 왕이다. ⓒ 김대홍



삼선동엔 계단이 많다. 산에 만들어진 동네니 계단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똑같은 계단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삼선동 계단은 정성이 많이 들어간 명품 계단이다.

삼선동에 있는 대학인 한성대 미술대학 공공미술 수강생들과 다음카페 '거리의미술동호회' 회원들, 삼성 에스원 직원들은 삼선동 계단에 그림을 그릴 계획을 세웠다. 2003년 답사를 하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2004년 작품이 완성됐다. 4년이 지났으니 다소 색이 바랜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전하다.

계단에 그려진 그림은 모두 다르다. 어떤 그림이 어떤 계단에 그려져 있는지 찾아보는 일은 즐거움이다. 어느 계단엔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이모티콘들이 그려져 있다. 설운도·송대관·태진아 그림도 보인다. 꽃과 우산도 보인다. 가장 재미있던 그림은 화살표다. 긴 계단 양쪽에 한 면은 오름화살표, 한 면은 내림화살표다. 화살표 크기도 놀랍거니와 계단에 화살표를 그리고자 한 생각이 재미있다.

계단을 찾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길 이름도 보게 된다. 장수길·천사길·선녀길…. 우리가 바라는 소망들이 길에 모두 담겨 있다. 나무꾼길까지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 골목길에선 군용 모포를 봤다. 저토록 빛 바랜 모포를 지금껏 쓰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알뜰한 것인지 잘 못 버리는 것인지. 버려진 개를 주워 기르는 문동현씨의 마음이 저랬을까.

어느 골목 바위엔 1984년 7월 15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인터넷에서 검색해봤다. 눈에 들어오는 큰 사건은 없다. 아마 남들은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은 잘 아는, 아니면 글을 새긴 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삼선동에선 부드럽게 휘어지는 길이 매력이다. 성곽 옆에선 성벽을 따라 휘어진 길이 운치 있다. 삼선초등학교 옆 동네서도 부드럽게 휘어진 길을 볼 수 있다.

작가 권혁웅은 삼선동 생활을 바탕으로 쓴 시집 <마징가 계보학>에서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고 표현했지만, 나는 부드럽게 휘어진 골목길을 보면서 독고탁의 커브를 떠올렸다.

바둑판처럼 반듯한 길이 대세지만 똑같은 길은 쉽게 질린다. 그런 길에선 굳이 길을 감상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삼선동 성곽길을 다니다 보면 길이 그림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리 괴롭히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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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천. 성북구청 근처. ⓒ 김대홍



삼선동 옆을 흐르는 물줄기는 성북천이다. 청계천보다 폭이 좁고 덜 가꿔져 있다. 그래서 좋다. 강폭이 들쭉날쭉해서 물 흐름에 따라 폭이 달라져 자연하천 느낌이 난다.

하지만 걷거나 자전거 타기엔 불편하다. 성북구청에서 흐름이 한 번 끊어지고, 성북구청을 지나면 딱히 보행로가 없다. 한강·청계천·안양천·탄천·중랑천·불광천 등 사람이 붐비는 하천만 보다가 사람이 없는 하천을 보니 새롭다.

사람들은 보행로가 있는 성북구청 부근에 모여 있다. 산책하는 사람들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애들 환호 소리가 들린다. 오리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는 아이들 소리다.

오리는 물 위에선 부드럽게 헤엄치고, 돌다리 위에선 '뒤뚱뒤뚱' 걷다가 다시 물위를 유연하게 미끄러진다. 아이들은 물 옆 풀숲을 뛰어다닌다. 아이들 걸음으론 오리 털 끝 하나 못 건드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오리를 쫓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아이들의 부모님이 한마디 한다.

"오리 괴롭히지 마라."

보행로 옆에선 중년남성 두 사람이 바둑에 푹 빠져 있다. 담배 세 갑이 뒹굴고 있고, 음료수병까지 있는 것을 보면 꽤 오랫동안 바둑을 둔 모양이다. 경기보다 더 재미있는 게 '어깨너머 구경'이라고 했던가. 지나던 이들이 한 번씩 머물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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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삼매경. 성북천에서. ⓒ 김대홍


'비우당'과 컨테이너 박스에 사는 전직 국회의원

삼선동엔 유명한 문화재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삼군부 총무당 또 하나는 비우당이다. 삼군부 총무당은 조선조 대궐 수비, 도성 순찰을 총괄하던 삼군부 청사(청헌당·총무당·덕의당) 중 중심 건물이다.

조선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이 조선초 최고군사기관이던 의흥삼군부 제도를 이어받아 광화문 남족 현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세웠다. 1930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는 육군사관학교 내 삼군부 청헌당, 정독도서관에 있는 종친부 건물 정도만 남아 있을 정도로 서울에선 보기 드문 건물이다.

비우당은 청백리의 상징이다.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유관은 모든 봉급을 마을 일에 쓰고, 정작 자신은 지붕 고칠 돈이 없어 비가 오면 방 안에서 우산을 쓰고 지냈다. 선조의 뜻을 '지봉유설'을 쓴 실학자 이수광이 이어받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자리에 초가집을 세우고 이름을 비우당이라 지었다. 이 초라한 집은 쌍용아파트 옆 원각사 입구에 있다.

놀랍게도 삼선동엔 현대판 이수광이 있다. 전 국회의원인 박영록(86)씨다. 4선 국회의원에 평민당 부총재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컨테이너박스다. 박 전 의원은 이전엔 삼선동 서민주택서 40년 동안 살았다.

전직 국회의원들로 이뤄진 헌정회서 주는 월급을 사회에 헌납하고 큰 집을 주겠다는 독지가의 제안도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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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록 전 의원 집. 컨테이너박스가 집이다. ⓒ 김대홍


지난해 '좋은사회를 위한 참여시민연대'가 주는 청렴정치인 대상과 황희문화예술진흥회가 주는 황희 정승 대상을 받았다. 낮시간에 찾았을 때 집문은 닫혀 있었다.

삼선동 여행을 마치고 나오다 성북구청을 봤다. 가건물 모양 구청이라니. 처음엔 신기했다. 그리곤 구청이 저런 모양이라도  괜찮겠다 싶었다. 천막당사도 있는데 말이다.

오랫동안 개발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던 동네, 비를 피할 집조차 부끄러워했던 정승 윤관, 컨테이너박스에 살고 있는 전직 국회의원. 시멘트를 부어 새 계단을 까는 대신 그림을 그려 만든 새 계단.

삼선동이란 이름에서 떠오르는 그림이 많다. 바뀔 땐 바뀌더라도 삼선동이 지닌 덕목은 고스란히 갖고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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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질 때 바라본 삼선동 ⓒ 김대홍


#삼선동 #골목 #미니벨로 #자전거 #성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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