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손주들은 또 무슨 죄인가

[백병규의 미디어워치] 국민과 화해하면 길은 많다

등록 2008.05.28 15:38수정 2008.05.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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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5월 28일자 양상훈 칼럼 '대통령 가족부터 30개월 미국 소 먹어야' ⓒ 조선일보PDF


아침 내내 망설였다.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다. 이것 써도 될까? 써야 할까? 그 내용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가족부터 30개월 넘은 미국 쇠고기만 골라서 먹으라니…. 내장탕에 뼈 국물로 만든 설렁탕과 곰탕도 함께, 그것도 최소한 1년 이상, 매달 두세 차례 이상은 먹어야 한다니…. 어디 그 뿐인가? 가능하면 가족들도 함께 먹어야 하는데, "손자 손녀들에게도 먹여야 한다!"니….

아무래도 심하다. 그 뜻이야 이해할 수 있다지만, 꼭 이렇게까지 '당신부터 드시오'라고 해야 할까? 이명박 대통령이야 그렇다지만, 그 가족은, 특히 손자·손녀들은 무슨 죄가 있는가? 아무리 이명박 대통령이 밉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너무 각박하고, 살벌한 주문이다.

아침 내내 망설였던 것은 그 내용이 이처럼 끔찍했기 때문이다. 비까지 죽죽 내리고 있는 2008년 5월 28일, 참으로 살풍경한 모습들이다.

<조선> 논설의원의 '가혹한' 주문

이 말은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손팻말을 들고 나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단체나 사람이 한 말이 아니다. 양상훈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28일 기명칼럼 '대통령 가족부터 30개월 미국 소 먹어야'에서 한 말이다.

양상훈 논설위원은 이명박 대통령과 그 가족이, 나아가 손자·손녀들까지 30개월 이상된 미국산 쇠고기를 내장탕과 설렁탕·곰탕과 함께 매달 두세 차례 이상씩은 꼭 챙겨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상황이 그만큼 비상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양상훈 위원은 "국민의 생각은 정부가 제 국민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고, "정부가 국민의 적이 되는 사태"라는 진단이다.

양 위원은 "국민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미국산 쇠고기 안 먹을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미국산 쇠고기가 싸고 맛있으면 너희들이나 먹으라'고 한다"면서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는 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민이 정부를 적으로 인식하는 상황이니 비상한 각오와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양상훈 위원이 이처럼 극단적인 처방을 내놓은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졸속 부실 협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양 위원은 "쇠고기 협상을 그렇게 급하게 타결짓고, 그나마 번역도 제대로 못한 정부가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는다면 말도 되지 않는다"고 다그쳤다.

그렇다고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입증한답시고 대통령이 손자·손녀까지 데리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겠다고 한다면 나라 체면이 어떻게 되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축산업자들 대통령이라는 말이 또 나오지 않겠는가?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그 정도도 미리 헤아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 양 위원은 "대통령과 장관들이 한우만 먹어도 시원찮을 상황에서 다른 나라 고기를 시범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임을 잘 알지만 "지금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잘랐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할까? 이명박 대통령의 가족들은 또 어떤 생각들을 할까? 이명박 정부의 장차관들과 청와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분들의 생각이나 반응은 잠시 접어두자.

궁금한 것은 <조선일보> 독자들의 반응이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대통령과 그의 손자·손녀들에게 까지 미국산 쇠고기를 모범적으로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반응일까? 아니면, <조선일보>가 정말 할 말을 했다, 시원하다고 생각할까?

반응은 뜨겁다. <조선일보>의 다른 칼럼들과는 달리 <조선닷컴> 양상훈 위원의 오늘 칼럼에는 무려 2백건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댓글 내용을 보면 대통령과 그 가족들부터 30개월 이상된 미국산 쇠고기를 시범적으로라도 먹어야 한다는 주장에 통쾌해 하면서도 <조선일보> 사람들도 그 대열에 동참해야 하지 않느냐는 시니컬한 반응이 많았다. <조선일보>에서도 어떻게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느냐는 놀라움을 표시한 댓글도 있었다. 물론 그 놀라움의 표시에는 '의외'라는 쪽과 '<조선일보>까지도 어떻게 이럴 수가'하는 또 다른 반응이 교차했다.

웃음거리 되느니 국민과 화해하고 재협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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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해 8월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한나라당 경선 선대위 해단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 오마이뉴스 남소연

어쨌든 양 위원이 이처럼 '독한 글'을 쓴 것은 이번 사태를 그만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부의 대응이 너무 안이하다는 지적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조선일보>의 이런 주문에 성의 있는 답변을 내놓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양상훈 위원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가혹한 주문'을 한 것은 양상훈 위원이 되지도 않을 일인 줄 뻔히 알면서 독자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혹은 <조선일보>의 면치레용으로 그저 한번 해본 것일까?

글을 써본 분들은 다 알겠지만, 결코 글을 쓰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또한 가볍게 쓸 수도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글을 읽을 가족들부터 생각하면 함부로 글을 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양상훈 위원의 '진정성'을 충분히 헤아린다고 해도 그 글대로 하기에는 너무 끔찍하다. 또 양 위원이 지적한 것처럼 '어이없는 일'이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정말 그렇게 한다면 나라의 위신은 어떻게 되고, 대통령의 체면은 또 뭐가 되겠는가?

다른 길은 없을까? 있을 것도 같다. 발상을 바꾸면 된다. 사태가 대통령과 그 가족들, 나아가 대통령의 손자와 손녀들까지 30개월 이상된 미국산 쇠고기와 사골 곰탕 등을 먹지 않으면 국민을 설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면, 국민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발상의 전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미국과 합의를 끝낸 마당에 이를 번복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국가 신인도의 추락이나 한미관계의 균열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하겠는가? 대통령과 그의 손자·손녀들까지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가면서까지 국민들과 불화하면서 안팎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국민들과 화해하고, 미국과 재협상하는 쪽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미국도 당장에는 발끈하겠지만, 한국민들의 '저항'에 순응한 한국 정부의 처신을 두고두고 문제 삼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미국정부가 '한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적 환경도 그리 나쁜 편만은 아니다. 한국과의 협상 결과를 내세워 미국정부가 압박을 가할 것이 분명한 일본이나 대만은 만약 한국 정부가 재협상에 나선다면 얼마나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는가? 물론 이들 나라들이 내놓고야 환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이들 나라들이 지금의 한국 정부를 내놓고 비난하지는 못하더라도 속으로는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을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발상을 바꾸면 길은 많다. 오늘 '양상훈칼럼'은 섬뜩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다른 발상의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칼럼'일 수 있겠다. 그래도 '손자·손녀'까지 들고 나온 것은 심했다. 아무리 심각하고 화가 나더라도 '연좌제'를 떠올리게 하는 주장이나 발상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됐다. 인간을, 생명을 존중하고, 책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런 '오버'는 경계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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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양상훈 #광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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