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따라 길따라, 먹는 게 남는 거야

[자전거 세계일주 88] 멕시코 엘 카마론(camaron)

등록 2009.01.17 16:55수정 2009.01.19 09:46
0
원고료로 응원
a

하악 종일 산 오르느라 힘들다. ⓒ 문종성


정신이 헤롱헤롱 세상이 빙글빙글, 완전 비몽사몽이다. 업힐에서 자전거는 그저 애물단지일 뿐이다. 피부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커멓게 아주 잘 익었다. 더 이상 흘릴 땀도 없다. 게다가 주변에서 쉬었다 갈만한 레스토랑도 보이지 않는다. 허기가 내 목을 조이고 있다. 숨을 고른 다음 산을 내려다보니 반나절 동안 올라오긴 많이 올라온 모양이다. 멕시코의 개마고원, 오아하까 주에서 톡톡히 고생 중이다.

'이쯤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


전지현의 S라인보다 더 요염한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대부분이 물자를 수송하는 트럭이다. 그런데 그 육중한 몸집에도 운전이 거칠어 지켜보는 나도 아슬아슬 할 때가 많다. 상하좌우로 격심하게 출렁이는 뜨거운 아스팔트를 내달리는 트럭이 올라치면 자전거는 조신하게 도로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당하면 무조건 나만 손해다.

아니나 다를까. 기어이 나를 지나치던 트럭 한 대가 얼마 후 14개의 바퀴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만 도로에 고꾸라졌다. 다행히 운전사는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트럭 세우는 일은 어찌할꼬? 운전이 거칠었다면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졸음운전 이거나 무언가에 취해있거나.

술의 천국 멕시코... 메스깔 몇 잔에도 헤롱헤롱

a

사고 거대한 트럭이 길 한 가운데에 고꾸라져 있다. 커브와 급경사가 혼합된 도로라 상당히 위험하다. ⓒ 문종성


a

선인장 고온건조한 기후라 산에 선인장만 가득하다. ⓒ 문종성


근거가 있다. 멕시코는 술의 천국이다. 데카떼와 코로나로 양분되는 맥주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찾고 화끈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데킬라를 즐겨 찾는다. 그리고 메스깔(Mezcal). 이 지역엔 특히 메스깔을 파는 상가들이 많다. 고온건조한 기후를 가진 까닭에 선인장의 종류인 마게이(Maguey)가 많이 자라고 이것으로 만든 술은 생수처럼 투명한 빛을 띤다. 하지만 식후 반주로 몇 잔만 걸쳐도 도수가 높기 때문에 금방 취할 수 있다.

정식으로 파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멕시코에서 본 메스깔은 모두가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허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불법인 셈이다. 술 좋아하는 거야 개인 취향이지만 음주운전은 살인행위인데, 그 운전자가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행여 나도 당할지 모른다는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입맛 돋워주는 새콤달짝한 '메멜리따스'

a

메멜리따스(memelitas) 단순한 재료 조합이지만 맛은 일품이다. ⓒ 문종성


a

닭국물 속을 풀어주는 든든함이 있다. ⓒ 문종성


한참을 더 가자 드디어 작고 허름한 가게를 만날 수 있었다. 가게 앞 도로를 북쪽 지역과는 다른 군복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는 까닭에 혹시 게릴라가 아닌가 식겁했지만 이내 긴장을 풀고 자리를 잡았다. 주문하기 전부터 깔끔하게 콜라 한 잔을 바로 식도로 털어낸 나는 흥미로운 작은 음식에 시선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멕시코를 여행하다보면 주 음식인 타코를 조금씩 변형해서 만든 사촌 격인 음식들이 참 많다. 이것은 토르띠야에 칠레소스를 입히고 치즈를 깔아 화덕에 구운 메멜리따스(memelitas)란다. 단순해 보이지만 새콤한 맛에 치즈의 달짝지근한 맛이 더해져 입맛을 돋운다. 작은 것을 제법 비싸게 부르긴 했지만 죽어도 먹고 죽자고 생각해 두 접시를 비우고 나머지 위장의 공간은 콜라로 채우고 자리를 일어났다.

하지만 극심한 체력 소진으로 음식물들은 금방 에너지로 연소가 되고 대신 콜라로 허기를 달랜 물배가 어디 갈까. 먹고 나서 뒤돌아서면 배고픈 자전거 여행자에게 맛은 둘째치고 양까지 부실하면 그만큼 서러운 것도 없다. 하지만 하늘은 자비로웠다. 두 시간의 라이딩 끝에 또다른 식당을 만나게 해 준 것이다.

"이구아나 한 번 먹어봐, 힘이 불끈 날 테니"

a

메스깔을 만드는 과정. 선인장을 숙성시켜 통에 담아 익힌다. ⓒ 문종성


a

메스깔 멕시코 남부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며 투명한 빛이지만 도수는 높다. ⓒ 문종성


"어서옵쇼, 와우! 자전거 여행이라니. 그래 뭘 줄까나?"
"뭐가 있는데요?"

"가만 있자. 이 양반 기력이 쇠한걸 보니 이걸 먹어야겠군."
"닭고긴가요?"

"이구아나일세."
"이구아나요? 그 파충류, 느릿느릿 기어가는?"
"오케이, 여기 사람들은 흔하게 먹는 건데 말야. 여기에 반주 한 잔 들이켜 봐. 힘이 불끈 솟아날 테니."

a

이구아나 음식 땡기긴 하지만 속을 생각해서 패스했다. 정말 치킨 맛이 날까. ⓒ 문종성


이구아나라니 쇼킹쇼킹. 재미있게도 특이한 동물의 맛은 닭고기로 귀결되는 예가 많다. 가장 대중적이어서 그럴까? 이 이구아나 고기도 닭고기와 맛이 비슷하다고 주인장이 추천해 준다. 하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가뜩이나 거친 식습관에 기인한 폭풍 설사로 속이 만신창이인 상황에서 새로운 모험을 하기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음식과 가장 가까운 오아하까식 백숙으로 속을 달래야 했다. 이구아나 음식이야 아프리카 가면 원없이 먹을 수 있을 테니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이구아나 요리과정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타이밍이 맞지 않아 볼 수는 없었다. 한 그릇의 닭국물을 들이키자 속이 한결 든든해졌다. 역시 한국인은 속 풀어주는 국물이 있어야 한다. 이 느낌을 오래도록 즐길 수 없음을 한탄하며 다시 안장 위에 올랐다.

멕시코에 발 들였다면, 절대 '맛' 놓치지 말길

a

당나귀 느릿느릿. ⓒ 문종성


세월아 네월아 해서는 도무지 이 산을 못 넘을 것 같다. 한 걸음 한 걸음 당나귀의 느릿한 움직임과 더욱더 정적을 지켜주는 메마른 땅 위의 한 그루 선인장은 날 더러 서두르지 마라 한다. 그러니 일찌감치 마을의 작은 성당을 찾아 노곤한 몸을 하룻밤 뉘기로 했다. 저녁은 쌀음료의 대가 오차타에다 샌드위치의 멕시칸 버전 토르디따스를 찾아 게걸스레 해치우곤 다시 점잖은 보폭으로 성당을 찾아 관리인에게 자비로운 미소를 던지곤 내 침대로 가서 그대로 쓰러졌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가슴으로 기억되고 좋은 구경을 하는 것은 눈으로 기억되듯 입은 독특하고 맛난 음식을 기억한다. 멕시코 여행이 끝나면 아마도 그 사람과 그 해변과 그 유적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멕시코 땅을 밟는다면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종성씨, 멕시코 여행 했다면서요? 칸쿤이 정말 그렇게 끝내주던가요? 체첸이사가 진짜 그렇게 위대하던가요? 과나후아토가 그렇게 로맨틱하다면서요?"
"이 사람들이 참…. 해변은 몰디브 가도 환상적이고 피라미드는 이집트 가도 볼 수 있는 거고 동화 같은 도시는 유럽에 가도 많소만, 멕시코 음식은 드셔봤수? 멕시코 여행은 음식으로 출발해서 음식으로 끝납디다. 관광지는 당신의 머리에서 기억되지만 음식은 당신의 가슴에서 기억되어질 것이오. 고로 먹는 게 남는 거요."

a

선인장 적막함을 더해준다. ⓒ 문종성


멕시코 여행 경험자들과 만나 이야기하면서 가장 많이 마음이 맞을 때가 바로 먹는 것이 화제가 될 때다. 그만큼 멕시코의 유산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콜로니얼 도시도 고대 피라미드도 아닌 먹거리라고 감히 단언한다. 멕시코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절대 '맛'은 놓치지 마라. 그 맛에 반한 자, 평생 행복한 그리움으로 살지 모르니까. 맛따라 길따라, 오늘도 행복한 자전거 여행은 계속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멕시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라이딩인아메리카 #자전거일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연재 비전노마드, 지구를 순례하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사 3년 만에 발견한 이 나무... 이게 웬 떡입니까
  2. 2 '내'가 먹는 음식이 '우리'를 죽이는 기막힌 현실
  3. 3 도시락 가게 사장인데요, 스스로 이건 칭찬합니다
  4. 4 장미란, 그리 띄울 때는 언제고
  5. 5 "삼성반도체 위기 누구 책임? 이재용이 오너라면 이럴순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