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억에 남는 결혼기념일 선물 '통닭'

"돌아가신 엄니도 '폭을 잘 잡으믄 맘이 편허다'고 혔잖여"

등록 2009.05.13 11:48수정 2009.05.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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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이른 봄 어느 토요일 오전이었다. '한겨레 토론방'에서 활동하던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새로운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고, 소설을 준비하는 아내는 옆에서 창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매력인 최진희의 '천상재회'가 흐르고 있었고, 평소 셀프로 끓여 마시던 커피를 아내가 타오는 것으로 봐서 주말 아침 분위기는 그런 대로 좋았다. 마우스를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온 정신을 창작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오늘이 며칠이냐?"라니, 날짜를 묻는 집사람의 속마음을 몰라 궁금했다. 하지만, 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컴퓨터 위에 놓인 달력으로 향했다.

"가만 있자, 오늘이 며칠이냐, 얼라, 벌써 22일이네!"

달력에 적힌 빨간 숫자를 세다 보니까, 아내와 함께 야외에 다녀온 지가 보름이 넘어가고 있었다. 총알처럼 빠른 세월을 탓하느라 묻는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날을 앞두고 챙기느라 묻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 허둥대고 있는데 아내가 답을 말해주었다. 


"어마! 그저께가 우리 결혼기념일이었는데, 그냥 지나갔네···."
"응? 으~응 그러게 말여···."

그렇다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침묵이 한참 흘렀다. 결혼기념일이 이틀이나 지난 것은 확실했고, 알고 있으면서도 내 눈치를 보다가 이제야 꺼낸 것인지, 아내의 속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어색해진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혼해서 셋집에 살면서도 아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은 꼭 챙겼는데, 아내를 죽도록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내 성격이 허락해주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화려한 이벤트가 아닌,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이나 삼겹살 등을 먹으며 지난날을 회고하는 것으로 기념해왔다.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 이틀이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는지,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통닭으로 위기를 벗어나다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내가 평소 통닭을 좋아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뭔가가 떠올라 속으로 '이거다!'하고 외치며 입을 열었다.

"어이, 자기가 좋아허는 통닭 먹어본 지 오래 됐지? 이틀이나 지나기는 했지만,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고 생각허고 오랜만에 멕시칸 통닭이나 한 마리 시켜먹자구, 이것도 선물이니까. 돌아가신 엄니도 '폭을 잘 잡으믄 맘이 편허다'라고 혔잖여."

아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금방 돌리는 걸 보니 통닭집 전화번호도 메모해 놓은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한참 묻더니 나를 쳐다보며 이왕 먹는 거 스페셜을 시키잖다.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날개와 다리가 2개씩 더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스페셜? 조치! 몇 달만에 먹는 것 같은디, 비싼 스페셜로 한 번 먹어보자구!"

처음 듣는 메뉴이고, 3천 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망설일 것 없이 박자를 맞췄다. 수화기를 놓고 조금 있으니까 통닭이 배달돼 왔고, 포장을 뜯으니까 새콤달콤한 양념 파우더와 고소하고 매콤한 양념소스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결혼기념일은 이틀이나 지났지만, 멕시칸 통닭 한 마리로 웃고 즐기며 기념할 수 있었는데, 아내와 통닭을 먹을 때마다 빠질 수 없는 양념이 하나 더 있다. 셋째 누님이 통닭집을 운영할 때 결혼했던 우리는 어머니, 형님, 큰 누님을 따라서 놀러다닐 기회가 많았다. 그러니 맛깔스런 추억의 양념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오징어 두 마리의 추억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먹는데, 어느 해인가 결혼기념일에 있었던 작은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오래 되었지만 별난 에피소드이기에 기억하고 있는데, 그날따라 호주머니 사정도 그렇고 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업사를 경영하는 친구에게서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구명줄 같은 전화여서 수화기를 놓기 무섭게 뛰어나가 12시가 가깝도록 술을 마셨다. 하지만, 정신은 더 말짱해지는 것 같았다. 친구와 헤어져 집에 오면서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걸었는데 동네 슈퍼 백열등 아래에 매달린 오징어 묶음이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에 '옳다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집사람이 오징어를 좋아하지, 오징어면 어떠랴, 성의인데··' 술래잡기하는 꼬마가 숨을 곳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하며 슈퍼에 들어가 오징어 두 마리를 사 들고 들어가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를 깨웠다.

"어이! 오늘이, 아니 12시가 넘었으니까 어제구나. 결혼기념일인데 돈도 없고 어떻게 허는가, 자기가 좋아허는 오징어 두 마리 사왔으니까, 두고 먹으라고, 내년에는 타이프라이터 사 줄게···."

막 잠든 모양이었다. 아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더니, 잊고 있었는데 이런 걸 사오느냐며 게걸스럽게 찢어 먹었다. 약속대로 이듬해 아내 생일에 타이프라이터를 선물했는데,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는 아내가 어찌나 예쁘고 고맙던지, 기뻐하던 잠옷차림의 아내 표정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흐뭇함은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며, 고마웠던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다.

선물에는 정성이 담겨야

인터넷을 하다 보면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라는 인사를 자주 주고받는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주는 그 이상의 인사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너무 흔하다 보니 유행가 가사만도 못하게 흘려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건강·행복 인플레이션 속에 사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결혼기념일에는 외국관광이나 고가의 선물을 받는 게 당연하고,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잖다. 선물에 대한 가치와 평가도 상대방 성의보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질에 집착한다. 미물인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게 없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분위기에 휩쓸려 행복 따먹기 전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 년에 한 번뿐인 결혼기념일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날이기에 그냥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정성이 담긴 선물은 신뢰의 표시이고 사랑의 증표이기에 생활에 활력소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오징어 두 마리나 통닭 한 마리로도 웃고 즐기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하긴, 아내가 이 글을 보면 강짜를 부릴지도 모르겠다. 지난 2월 스물일곱 번째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며 아귀탕 한 그릇 사준 것에 대한 미안함을 허접한 글로 때우려 하느냐고···.

덧붙이는 글 | <잊을 수 없는 선물 응모 글>


덧붙이는 글 <잊을 수 없는 선물 응모 글>
#결혼기념일 #선물 #통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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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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