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손톱 매니큐어에 대한 질문을 받고, '기부를 받을 때마다 하나씩 지워 나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권우성
이날 강연에서도 박원순 이사의 정치참여 문제는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동안 일관되게 여러 신문지면에서 강조한 대로 그는 정치는 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서울시장 나갈 것 같으면 여기 올 시간 있냐"며 "내가 살아온 일들은 공공기관의 장으로서보다는 지금 해왔던 식으로 내 맘대로 조직을 만들고 함께 꿈꾸는 사람들을 모아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시민운동이 너무 신나고 재밌어서 딴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스물일곱에 검사가 됐고, 스물여덟에 변호사 개업을 했는데 고향에서 국회의원이 됐던 연세 드신 분들이 찾아와 국회의원을 권유했다. 그러나 거절했다. 국회의원들은 악수를 많이 하는데 그게 싫었다. 악수하는 일에 청춘을 보내기 싫었다. 그 시간에 공부하고 싶었다. 아마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다면 그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국정원이 소송을 제기해준 뒤로 더 힘들게 됐다. 사람들의 반응이 훨씬 적극적이다. 예전에는 길을 가면 목례를 했는데 요즘은 쫓아와 말을 건다. 영국에 떠나 있다가 잊혀질 만하면 와야겠다."
대통령이 되는 것은 어떻겠냐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의 질문에는 "그럴 바에야 서울시장에 나간다"며 웃었다.
그는 "나는 거창한 일들보다는 작은 일을 좋아한다"며 "은퇴한 뒤 고향에 가서 시골 초등학교 명예교사를 한다든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명예통장을 하는 것엔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뿌리 깊은 나무> 고 한창기 사장 밑에서 법률고문을 지낸 바 있다"며 "한 사장 말이 대통령 할 사람은 너무 많은데 동 서기 할 사람은 너무 없어서 나는 동 서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었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고 전했다.
"한글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한창기 사장은 글을 쓰면 새빨갛게 고쳐놓을 정도로 쪼잔했다. 거기서 나도 배웠다. 나도 쪼잔하다. 나는 A형 남자다. 쪼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큰물보다는 작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
광화문에 텐트를 치겠다는 희망 전도사또한 박 이사는 "75년 서울대 1학년 시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경찰이 와서 너무 잔인하게 짓밟았다"며 "그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고 그걸 보고 가만 있을 수 없어 데모에 참여했고 결국 학교에서 잘렸으며 감옥까지 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만일 그때 내가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이귀남 법무장관처럼 돼 있지 않겠냐"면서 "위장전입도 여러 번 했을 테고 큰돈도 벌었을 것이지만 사회운동을 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많이 사귀게 됐고 그래서 행복하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 뒤에 그는 희망제작소 회원가입을 권했다. 당초 회원가입 없이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의 협치(가버넌스)로 활동할 계획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이후 일체의 후원이 끊겨 사업을 할 수 없게 됐고 회원모집을 통한 자립운동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소송을 제기해준 덕에 회원이 500명 정도 더 늘어나게 돼서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는 박 이사는 "조만간 광화문네거리에 텐트를 치고 우리 사회의 희망을 찾기 위한 회원모집에 나설까 생각 중"이라며 "고통의 시대, 수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또 "천국에 가면 착한 사람들만 있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냐"며 "죄 지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옥에 가서 희망제작소도 만들고 시민운동도 하면서 지옥을 천국으로 만드는 운동에 함께 하자"고 현실을 빗대 우스개를 펼치기도 했다.
이날 강연에는 80여 명의 시민들이 늦은 시각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켰으며, 강연 뒤에는 박원순 이사의 제안대로 줄을 서서 희망제작소 회원가입에 동참했다. 박원순 식 희망바이러스는 신종플루보다 더 빠르게 범인들의 가슴 속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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