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이명박 대통령'은 패배했다
나의 '잃어버린 15개월' 원상회복해야

[정연주의 증언 11] KBS 사장 해임처분 취소 판결 받던 날

등록 2009.11.17 12:17수정 2009.12.0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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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오전 10시 서울 행정법원 201호실. 지난해 나를 KBS 사장 자리에서 해임한 이명박 대통령을 상대로 낸 '해임처분 무효 청구소송' 1심 판결이 있었다. 나는 이날 조금 이른 시간에 서울 서초동에 있는 행정법원에 도착했다. 카메라 기자들이 벌써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행정법원은 내가 '배임 혐의'로 형사사건 재판을 받아 온 서울 중앙지방법원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해 해임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형사 사건인 '배임 사건'과 행정소송 사건인 '해임처분 무효 청구소송' 등 두 가지 재판으로 1년여의 세월을 보내왔다.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에 타격 가하는 판결들 줄이어

 정연주 전 KBS 사장이 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언론악법 통과뒤 향후 언론지형에 관해 강연하고 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언론악법 통과뒤 향후 언론지형에 관해 강연하고 있다.남소연

형사 사건인 '배임 건'의 경우에는 검찰의 수사기록만도 무려 6천 쪽이 넘어, 그걸 다 읽느라,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가끔 "고시 공부 하시오?"라고 물었다. 행정 사건도 챙겨야 할 자료들이 적지 않았다. 최근 한 후배는 "로스쿨 한번 도전해보시지요" 했다. 이 혹독한 '이명박 세월'을 웃으면서 질기게 살아가자며, 그런 이야기를 했으리라.

지난해 8월 11일 해임됐다. 그 날 밤 나는 KBS 사장실에서 거의 새다시피하면서 자료들을 정리하고 다음 날 KBS를 떠났다. 집에 도착하자 얼마 뒤 검찰에서 나를 체포하여 검찰청사로 데려갔다. 이틀 동안 검찰 청사에 머물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이 일방적으로 물었고, 나는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고, 나중에는 그냥 고개만 저었다.

조사받는 11층 방에서 밖을 내다보니, 대법원 뒤쪽으로 조그만 산이 보였다. 푸르다 못해 검은 기운까지 띠는 무성한 여름 나무들이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여름이 왕성했던 시절부터 서초동 법 동네를 다녔다. 노란 은행 빛이 고운 가을이 스쳐지나갔고, 하얀 눈으로 덮인 겨울 길을 걸을 때는 매서운 칼바람이 귓전을 스쳤다. 봄의 연초록 생명이 돋아날 때도 나는 여전히 두 개의 재판 한 가운데 있었고, 불과 석 달 사이에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이 잔인하고 혹독한 세월 속에서도 그렇게 법원을 오가며 보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그 토요일 다음 월요일, 배임사건으로 재판정 피고석에 앉아 있는데, 머리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필 이날 검찰 증인으로 나에게 그렇게도 적대적이었던 진종철 전 노조위원장이 나와 이런 저런 이상한 주장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계절이 윤회하면서 한 해를 넘기고, 또 샛노란 은행잎이 이 모진 세월을 못 이겨 서럽게 우는 이들의 눈물처럼 후둑후둑 길거리에 무더기로 떨어질 무렵, 그리고 나의 임기가 불과 열하루밖에 남아 있지 않은 날에, '해임처분 무효 청구소송'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 감사원· 검찰 ·국세청· 방통위 KBS 이사들, 모두 패배


 차OO KBS 시청자센터장은 2007년 11월 21일 밤 11시 생방송 '질문 있습니다!'라는 KBS 특별 토론그램에 출연하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에게 생방송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자연스럽게 하세요"라고 조언(?)을 했다.
차OO KBS 시청자센터장은 2007년 11월 21일 밤 11시 생방송 '질문 있습니다!'라는 KBS 특별 토론그램에 출연하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에게 생방송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자연스럽게 하세요"라고 조언(?)을 했다.PD저널

이날 판결에서 재판부는 나의 해임처분과 관련하여 그 절차와 내용이 모두 부당하고 법을 어긴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해임처분을 취소하라"고 판시했다. 이 사건의 원고는 정연주이고, 피고는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통위 등 온갖 권력 기관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나를 해임한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 판결에서 피고 이명박 대통령은 패소했다. 사법의 재판정에서 그는 패배했다.

패배자는 피고 이명박 대통령뿐이 아니다. 그의 수족이 되어 주도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의 해임에 개입하고 가담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을 비롯하여, 정치감사, 표적감사를 한 감사원의 영혼 없는 공무원 집단, 나를 배임죄로 엮어 놓은 정치검찰 수사라인, KBS에 프로그램을 납품한 7군데 외주제작사들을 고강도 세무조사를 하여 정연주 비리 캐기에 혈안이 되었던 무자비한 국세청 직원들, 그리고 나를 해임시키는데 동원된 KBS 친여성향의 이사들.그들은 사법적 판결에서 패배했다. 앞으로 있을 역사의 재판정에서는 더욱 엄혹한 판결과 심판이 있으리라 믿는다.

패배자들이 어디 이들 직계 선상의 인물뿐이겠는가. 나의 해임에 아주 구체적으로 펌프질을 해댄 한나라당, 조중동 조폭언론, 그리고 KBS 내부에서 끊임없이 '꺼리'를 제공했던 박승규 노조집행부. 그들도 사법적 판결을 내린 법정의 패자들이다. 그러니 해임에 이를 때까지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정작 1심 판결이 나오자 애써 무시하려 한다. (나는 이들이 마치 삼각편대처럼 '정연주 자르기'에 직 간접의 공생적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앞으로 계속 될 나의 증언의 주요 부분이기도 하다).

"고시공부 세게 하더니 양시 다 패스했네"

 KBS 사장 재임시절 회사에 1,892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불구속 기소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8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KBS 사장 재임시절 회사에 1,892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불구속 기소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8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유성호

'해임처분 취소'의 판결이 있고 난 다음 날, 리영희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 마침 내가 전화를 받지 못하자, 음성 메시지를 남겨놓으셨다.

"판결소식, 뉴스로 전해 듣고, 뭐 으레 그리 될 것이라 믿었지만, 정말 잘 되었소. 이제 이 폭력집단의 정체가 다 밝혀졌으니, 그것이 많은, 큰 영향을 줄 것이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돌아가기야 어렵겠지만, 아무튼 그동안 참 수고가 많았소."

어느 대선배 어른께서도 전화를 주셨다. "고시 공부 세게 하더니, 양시(형사사건과 행정사건) 모두 패스했네", 그러셨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변호사님들 덕분이었다. 조준희 변호사님을 비롯하여 백승헌 민변회장, 조용환, 김기중, 송호창, 한명옥, 그리고 김영식 변호사님들 덕분이었다. 이 엄혹한 시대 만난, 참 귀한 분들이다. 이명박 정권 출범 뒤 민변 변호사들 보통 고생이 아니다. 촛불 참여자에 대한 재판을 비롯하여 이명박 정권 아래  빚어진 온갖 반민주 사건이 폭주하다 보니, 얼마나 바빠졌는지 모른다. 민변 변호사들이 바빠졌다는 것은 반민주의 역주행이 얼마나 광폭한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법원을 오가면서 법원 주변에서 많은 1인 시위자들을 보았다.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얼마나 억울하고 호소할 데가 없으면 저렇게 호된 고생을 하나 싶었다. 나야 그래도 'KBS 사장' 지낸 덕에 내 이야기와 억울함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하고, 그래서 억울함이 나눠지기도 하지만, 세상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저 무명의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한과 억울함은 누가 풀어줄까. 조작된 간첩 혐의로 온 가족이 고문을 당하고, 십수년을 징역을 살고, 심신은 다 망가지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진도가족간첩단사건'(13일 서울고법 재심에서 무죄 선고)을 비롯한 수많은 조작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들의 삶은 누가 보상해주는가.

'잃어버린 15개월' 원상회복 되어야

'해임 처분 취소' 판결 이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사장 복귀 여부에 대한 것이다. 어느 누리꾼은  KBS 연말 시상식에 그냥 나가서 시상을 하라 주문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은 12일 판결에 대해 애써 침묵하면서 하찮은 사건인 양 대한다. 그러면서 항소 뜻을 밝혔으니, 기다려 보자는 입장이다. 그런데 임기가 끝난 뒤 진행되는 항소심부터는 '소송의 실익'이 없으니, '해임처분 무효 청구'의 내용보다는 형식 논리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12일의 1심 판결이 해임의 내용을 가지고 다투는 사실상의 최종심인 셈이다. 만약 내 임기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 남아 있다면 모를까, 임기가 불과 열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항소했으니..."라는 논리는 참으로 옹색한 게 아닐 수 없다.

역설적으로 바로 임기가 열하루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1심 판결의 내용과 정신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나는 '원상 복귀'가 '잃어버린 15개월의 복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1심 판결, 즉 '해임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의 내용이자 정신이다. 만약 임기가 끝나버렸다고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온갖 못된 짓을 다 해도, 그만인 셈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위법을 바로 잡고, 정의를 세우는 바탕이 허물어지고 만다. 이건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원칙의 문제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인사들이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법치'니, '정의'니, '선진국'이니, '나라의 품격'이니 하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나의 해임 이후 KBS는 '불법 체제'

그리고 KBS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1심 판결에서 나의 해임의 절차, 내용이 모두 부당하고 법을 어긴 것이다라고 했으니, 나에 대한 '원상 회복'이 이뤄지지 않으면 나의 해임 이후 체제, 이병순 체제는 부당하고 법을 어긴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지금의 후임 사장 논의도 부당하고 법을 어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원상회복이 이뤄지지 않으면 KBS 체제는 계속 '불법 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KBS 신임 사장 선임과 관련하여 "그 절차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에는 나를 해임한 뒤 "이제 KBS가 거듭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온갖 권력기관들을 총동원해서, 부당하게 법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해임한 대통령이 그런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지, 지금의 '불법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사장 선임과 관련하여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알아야지.

KBS의 '불법체제'를 낳은 나의 해임 작전은 지난해 2월말 이명박 대통령 취임 전에 이미 발동이 걸렸고,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 본격화되었다. 2008년 이른 봄, 내게 이런 검찰 쪽 정보 보고가 전해졌다. 정권의 '마녀사냥'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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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피고 이명박 #조폭언론 #박승규 #해임처분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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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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