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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나이도 여덟 살이 되자 국민(초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왼쪽 가슴에 코가 질질 흐르면 닦으라고
할머니가 달아주신 손수건을 매달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진학하게 된 초등학교서 맨 먼저 본 시험이 받아쓰기 시험이었지요.
선생님이 음성으로 불러주시고 우리 학생들은 공책에 낱말을 적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미리부터 아버지로부터 한글을 모두 깨우치고
진학한 터였음에 그깟 받아쓰기쯤은 '누워 떡 먹기'였습니다.
"와아~ 하나도 안 틀렸네?"
그 뒤로도 시험을 받는 족족 100점은 오로지 저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단숨에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는 학생으로 각인되고 부각되기에까지 이릅니다.
가정환경조사서에서 어머니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학생임을 간파한 선생님께선 수업이 끝나도 저를 곁에 두길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어려선 너처럼 어려웠단다.
하지만 그걸 이겨냈기에 오늘날이 있는 거야."라는 따위의 덕담도 아끼지 않으셨지요.
그 해 봄 학교 뒤 나지막한 산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선 달랑 김밥 하나에 찐 계란 두 개만 갖고 나선 저를 '은밀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곤 급우들 몰래 사이다 한 병과 초콜릿인지 뭔지
아무튼 너무도 황홀한 맛을 자랑하는 과자까지도 제 주머니에 냉큼 넣어주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저로선 정말이지 친엄마요, 또한
하늘이 보내주신 천사라는 느낌을 지니게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생님과의 인연은 너무 짧았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에 등교하니 그만
그 선생님께선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어린 마음에 그 선생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상은 지난 44년 전부터 제 마음의 일기장에 기록되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생생한 기억의 토대(土臺)입니다.
물론 그 선생님의 존함 역시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선생님은 채*숙 선생님이십니다.
대체로 사람은 유년시절의 행복과 불행을 더욱 기억하지 싶습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선생님과의 인연이 40년도 더 지났으되 지금도 잊지
못 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맥락의 연장이라고 믿습니다.
채 선생님께선 무시로 제게 멘토 역할까지를 해 주셨습니다.
"내 어려운 처지를 남과 비교하지 말거라.
되레 남들이 널 부러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올해도 스승의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육순이 넘어 정년퇴직하시곤 할머니가 되셨을 채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2
이후 세월은 저벅저벅 흘러 당시의 여덟 살 소년도 나이를 계속하여 먹습니다.
그리곤 결혼을 하여 사랑하는 자녀를 갖게 되지요.
딸이 고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극심한 빈곤의 쓰나미가 닥쳤습니다.
그건 잇따라 사업과 장사에서 연전연패한
당연한 수순이자 귀결의 아픔이었지만 말입니다.
얼마나 어려웠는가 하면 학교에 내야 하는 등록금조차
마련이 어려웠으니 더 말 해 무엇하겠습니까!
연일 계속되는 빚쟁이들의 아갈잡이와 더불어
무능한 저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그만 세상을 살 기운조차 없었습니다.
이랬을 즈음에 하루는 딸이 희소식을 물고 와 전했습니다.
"제 어려운 처지를 아시곤 담임선생님께서 학교(장)에 말씀을 하셨던가 봐요,
그래서 장학금을 받게 될 공산이 높고 심지어는..."
학교의 급식비까지 면제를 받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순간 쥐구멍에 볕이 들고 빈 집에 소까지 들어왔다는 느낌이더군요.
그렇지만 마냥 좋아라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건 딸이 입게 될 정신적 충격이 만만치 않을 거란 예단이 작용한 때문이었지요.
'아무리 전교 1등의 성적이라곤 하지만 다른 학생들과는
차별화되게, 그것도 더욱이 급식까지 공짜로
제공받는다는 자격지심을 느껴야 할 내 딸의 심경은 오죽이나 비통할까!!'
딸은 그런 저의 속내를 금세 읽어냈습니다.
울적한 표정으로 울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우두망찰하고 있는 제게 딸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빠, 저는 씩씩하니까 염려 마세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렵고 칙칙한 가정환경이란 바다의 격랑을, 그러나 딸은
그러한 '파도를 탓하지 않는 어부'로 돌진했습니다.
딸은 결국 그 학교서 유일무이하게 S대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으니 말입니다.
딸이 그같은 쾌거를 일궈낸 뒤 너무 고마웠던 저는
딸이 졸업한 학교로 100개들이 드링크 한 박스를 사 들고 갔습니다.
그리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일반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감사의 정중한 표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든 게 선생님들의 덕분입니다!"
"선생님들께선 제 여식의 진정한 멘토이셨습니다."
사람이 이 풍진세상을 사노라면 예기치 않은 돌발변수의 암초들이 무시로 나타납니다.
이를 거뜬히 해결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지요.
이런 경우 가장 필요한 존재가 바로 멘토입니다.
'인생 길잡이'로도 알려진 이 멘토는 그러니까
제게 있어선 초등 시절의 담임선생님이었고 딸의 경우는
고교 시절 그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그 범주라 하겠습니다.
어떤 반대급부를 원하지 않는 멘토와 달리 스폰서(sponsor)는
그 토양과 영역부터가 다르다고 느끼는 터입니다.
즉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어떤 진리와 숭배의 속성을
그들 스폰서(들)는 철저히 이행한다는 것이죠.
이같은 주장은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일부 검사들의
이른바 '불건전 스폰서 파동'이 그 방증이라 하겠습니다.
세상을 들끓게 한 검사 스폰서 파동에 대하여 혹자는 검사들에게
돈(과 향응, 그리고 그 외의 것을 포함한)을 준 자도 나쁘지만
그걸 받아먹은 검사는 더 나쁘다는 양비론(兩非論)을 펼친 이도 있었습니다.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폰서의 어떤 정의라는 건 일시적으론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일지 몰라도 결국엔 배반과 배신의
파국이란 사필귀정의 종착역에 닿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왜냐면 애당초 스폰서라는 건 그야말로 주식투자의 그것처럼 돈 내고
더 많은 돈 먹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 하는 천민 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이자 거기서
근거한 '봉창하기'(봉창하다 = 물건을 몰래 모아서 감추어 두다.
손해 본 것을 벌충하다)이란 의식이 존재하는 때문이죠.
늘 그렇게 헉헉대며 지리멸렬하게 사는 필부였는지라
제 인생에 스폰서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멘토는 있었지요.
한데 멘토(들)는 언제나 그러했듯 스폰서처럼 자신이
투자한 것(그것의 물질이 금전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의 몇 배 이상을
우려내고자 하는 속셈이 원천적으로 없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멘토는 하나같이 진정성을 보였으며 또한
아무런 반대급부조차도 사양한 진정한 휴머니즘의 소유자(휴머니스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폰서와 멘토의 차이라는 시각입니다.
사족이겠지만 부적절한 스폰서는 사라지고 아무런
조건이 없는 멘토만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오죽이나 좋을까란 느낌을 지녀봅니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은 스폰서가 있습니까?' 응모글입니다
2010.05.02 13:15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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