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처는 번호 따기"... 이정희 발목잡은 불편한 진실

[게릴라칼럼] 지금까지의 공천, 경선방식 모두 재고해야

등록 2012.03.21 10:15수정 2012.03.2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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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2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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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20일 서울 관악을 경선에서 일부 당원들에게 나이를 속여 여론조사에 응하라는 취지의 '거짓 투표' 독려 문자 발송이 있었던 사실을 시인한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 대표는 이 자리에서 "김희철 민주통합당 의원이 원한다면 재경선을 하겠다"고 밝혔다. ⓒ 남소연


누군가는 그랬다. 어떻게 "이정희가 그럴 수 있느냐"고. 또 누군가는 그랬다. "이정희 똥 밟았네!"

새로운 진보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이정희. 18대 국회 비례대표의원으로 국회에 들어선 젊은 초선 여성 정치인 이정희는 누구보다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나아가 '부드러운 진보'를 모토로 구 민주노동당 당대표에 이어 통합진보당의 공동대표에까지 올랐다.

구 민주노동당이 주류 언론에 의해 단순 무식한 돌격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여기에 '부드러움'을 얹혀 대중성을 높인 것은 단연 이정희의 공이다. 그동안 정치적 원칙과 실리적 이해관계 사이에서 갈등하던 진보정당이 강기갑 대표 시절을 이어 유연한 연대정신을 지속적으로 발휘한 것도 이정희 의원의 공이 크다.

그런 이정희 의원이 여론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바로 '여론조사 조작 의혹' 때문이다. 언론은 20일, 일제히 관악을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김희철 민주통합당 후보에게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어 온 이정희 의원의 보좌관이 당원들에게 '나이를 속여 응답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돌렸다고 보도했다. 연령대로 할당되어 있는 표본수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샘플이 부족한 20~30대 연령대인 것처럼 거짓 응답해야 반영이 된다는 이유였다.

언론과 온라인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를 일굴 차세대 리더로 각광받는 이정희 의원의 보좌관이 그런 부정을 저질렀다니. 상대적 배신감도 한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당장 이정희 의원도 잘못을 시인하고 김희철 의원이 원할 경우 재경선 수용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 이정희 의원에게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정희 의원 스스로도 문제를 시인한 마당에. 그런데 이런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론조사 경선의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국민참여경선과 여론조사 승부의 역사


후보 단일화에 여론조사가 동원된 계기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진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당시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간의 단일화였다. '반창연대'를 슬로건으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 후보단일화를 꾀하던 두 사람은 대선을 코앞에 둔 2002년 11월 24일, 오후 1시부터 7시간 동안 두 개의 여론조사 전문기관에서 각각 2000개의 샘플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단일화를 이루기로 합의했다.

결국 둘 중 유효조사로 인정된 한 곳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가 46.8%를 얻어 42.4%에 그친 정몽준 후보를 누르고 단일후보로 확정됐다. 이런 결과는 한나라당 지지자의 역선택을 막기 위해 해당 시점의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보다 낮게 나온 다른 한 개의 여론조사 조사결과를 무효화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론조사 단일화는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응답자 중 일부를 다시 가려내는 방식에서 오차범위가 더 커질 수 있지만, 두 종류의 여론조사조차 그 범위를 벗어났다는 문제제기부터 애초 추정치만을 제시하는 여론조사 결과로 승부를 내는 것이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비아냥까지 다양했다.

어쨌거나 바닥 지지율을 기록하던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 자리에 까지 올려놓은 상향식 국민참여경선과 여론조사 승부는 정당 보스나 계파지도자에게 독점되어 있던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줬다는 점에서 한국 정당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물론 2002년 이후 간혹 상향식 경선이 치러지기는 했지만 2008년 총선을 비롯해 이후 여러 선거에서 한국 주류 정당의 공천방식은 여전히 중앙당 지도부에 의해 지명된 공천심사위원회가 후보를 심사·선정하고 이를 최고위원회가 의결하는 하향식이었다. 그러나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를 비롯해 반MB야권단일화의 요구가 거세지자 다시 국민참여경선과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결정방식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부작용은 예상되었다.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기술적 능력은 명운을 걸고 싸우는 후보들에게 각종 꼼수를 개발하도록 만들었다. 보스에게 줄을 대던 방식에서 대중여론을 조작해 내는 능력이 전문적 선거 기술로 인정받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론조사 경선의 불편한 진실

야구동호회 사이트 'MLB PARK'에 올라온 문자 메시지 캡처본이다. ⓒ 누리꾼 '퍼지'


문제는 초기의 긍정성조차 각종 꼼수가 개입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내 경선에서도 소위 종이당원, 박스당원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 국민참여경선에서도 조직력과 금력을 활용한 동원경선이 빈번하게 자행됐다. 이 과정에서 구태정치의 전형인 매수 행위도 이루어졌다.

여론조사 경선 방식은 좀 더 전문화됐다. 흔히 여론조사가 조직력보다는 대중적 호감도로 결정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선 이런 여론조사에서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거주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휴대전화 조사는 제외된다. 자연스레 휴대전화만을 사용하는 젊은층이 제외되어 자영업자나 주로 집전화를 사용하는 40~50대 이상의 응답이 과대대표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샘플은 크게 KT등재 전화번호부를 이용하거나 RDD(임의전화걸기방식)로 이루어지는데, KT등재 전화번호부의 경우에는 대상 번호를 미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조직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런 이유로 조직력이 강한 정당에서는 KT등재 전화번호부를 이용한 여론조사 방식을 선호하는 것이다.

여론조사 경선이 예상되면, 각 선거본부는 우선 KT등재 전화번호부를 활용한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여론의 추이를 확인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최대한 후보의 특징과 이름을 알려 인지도를 쌓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여론조사 경선이 현실화되었을 때 유리한 토대를 형성할 수 있다.

실제 단일화 경선에서는 '전화번호 따오기'가 승부를 가른다. 최대한 전화번호를 확보하고, 조사 기간 중 믿을 만한 사람들의 휴대전화로 착신 설정을 한다. 이렇게 하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응답을 대신할 수도 있다. 간혹 이 과정에서 금전이 오고 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전화 조사의 특성상 응답자가 몇 살인지, 실제 살고 있는 주소가 어디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한 사람의 복수응답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RDD방식도 금력과 조직력이 큰 영향을 미친다. 여론조사를 앞두고 여유가 있는 선거본부에서는 단기 전화기를 최대한 많이 설치한다. 일명 콜센터. 여기서는 후보를 홍보하는 일도 하지만 여론조사에 응답도 한다. 무작위로 거는 전화에 당첨(?)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여론조사 응답률을 생각해보라. 연령대별로 샘플의 숫자가 할당되어 있고 숫자가 채워질 때까지 계속 조사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의지를 가지면 전화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선거본부들이 여론조사 경선 승리의 대책을 세울 때,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번 이정희 의원의 보좌관이 20~30대로 응답하라는 내용을 시사하는 문자 메시지를 돌린 것 역시 이런 맥락이다.

물론 주소가 다른 지역에 전화가 갈 수도 있다. 이번 안산단원갑 지역에서 나타난 타지역구 여론조사 응답이 이런 경우다. 안산단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런 문제는 피할 수 없다.

선거전문가들이 "이정희 의원, 똥 밟았네"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여론조사의 이런 맹점과 그동안의 선거운동 관행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본다면, 이정희 의원 보좌관이 저질렀던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선거본부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여론조사 경선 승부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기대하는 진보정당

그렇다 하더라도, 국민들이 이번 사건에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사자가 다름아닌 새정치의 아이콘 이정희 의원이기 때문이다. 이정희 의원을 지지했던 국민들이 보내는 안타까움과 실망에는 구태정치를 떨쳐 버리라는 국민들의 바람이 반영되어 있다. 조직력으로 승부하는 거대정당을 이기기 위해서는 역시 조직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국민들이 진보정당에게 기대하는 것은 현실정치에 대한 능숙한 적응이 아니라, 구태와 과감하게 단절하는 새로운 정치다. 통합진보당이 원내교섭단체를 목표로 달려가면서 결별해야할 정치행태와 부득이하게 손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진보정당이 창당 초기, 정당보스가 아니라 당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당원민주주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또 이런 자부심이 소수정당임에도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국민들은 진보정당에게 기성정당보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지만 막상 그만큼의 지지는 보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중잣대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중잣대가 결국은 정치를 바꾼다. 그것이 진보정당의 씨앗이고 미래의 희망이다. 

진보정당에서도 구태의연한 현실정치를 따라하는 것이 마치 전문적 능력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다면, 언제가 진보정당이 새로운 정치를 주도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국민들의 호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설령 원내교섭단체가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진보정당의 목표가 단순한 집권이나 원내 다수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구현에 있음을 믿는다.  

정당 공천, 야권 경선방식 재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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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소연

어쨌거나 이 문제를 한 명의 의원이나 보좌관의 실수로 넘겨버린다면 한국 정치의 발전은 없다. 무엇보다 흥행을 이유로, 쉽고 단순하다는 이유로 지금과 같은 여론조사 방식을 승부의 주요 잣대로 사용한다면, 이제 우리 선거판은 여론조작 전문가가 날뛰는 현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정당 내부의 공천은 진성당원의 권한에 맡겨 주는 것이 옳다. 국민참여경선 등의 방식은 상황적 필요에 따라 도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성당원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야권단일화를 위한 경선 방식 또한 새로운 방법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미 국민참여경선이나 여론조사의 문제점으로 인해 지난해 야권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는 공론조사 방식을 차용하여 추첨으로 선발된 배심단들이 후보 간 토론회를 직접 시청한 후 투표하는 방식을 결합시킨 바 있다.

잘못된 방식에 적응하고, 이를 활용하는 기술과 능력을 기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여론조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단지 추정치만을 제공하는, 그것도 표본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게 열려있는 집전화 조사 방식으로 후보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인지 개탄할 것이다.

이번 사건이 단지 한 사람의 의원과 보좌관을 비난하는 것에서 나아가 진보정당의 가치를 확인하고 후보 공천과 경선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여론조사경선 #야권단일화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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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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