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동호회 사이트 'MLB PARK'에 올라온 문자 메시지 캡처본이다.
누리꾼 '퍼지'
문제는 초기의 긍정성조차 각종 꼼수가 개입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내 경선에서도 소위 종이당원, 박스당원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 국민참여경선에서도 조직력과 금력을 활용한 동원경선이 빈번하게 자행됐다. 이 과정에서 구태정치의 전형인 매수 행위도 이루어졌다.
여론조사 경선 방식은 좀 더 전문화됐다. 흔히 여론조사가 조직력보다는 대중적 호감도로 결정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선 이런 여론조사에서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거주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휴대전화 조사는 제외된다. 자연스레 휴대전화만을 사용하는 젊은층이 제외되어 자영업자나 주로 집전화를 사용하는 40~50대 이상의 응답이 과대대표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샘플은 크게 KT등재 전화번호부를 이용하거나 RDD(임의전화걸기방식)로 이루어지는데, KT등재 전화번호부의 경우에는 대상 번호를 미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조직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런 이유로 조직력이 강한 정당에서는 KT등재 전화번호부를 이용한 여론조사 방식을 선호하는 것이다.
여론조사 경선이 예상되면, 각 선거본부는 우선 KT등재 전화번호부를 활용한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여론의 추이를 확인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최대한 후보의 특징과 이름을 알려 인지도를 쌓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여론조사 경선이 현실화되었을 때 유리한 토대를 형성할 수 있다.
실제 단일화 경선에서는 '전화번호 따오기'가 승부를 가른다. 최대한 전화번호를 확보하고, 조사 기간 중 믿을 만한 사람들의 휴대전화로 착신 설정을 한다. 이렇게 하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응답을 대신할 수도 있다. 간혹 이 과정에서 금전이 오고 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전화 조사의 특성상 응답자가 몇 살인지, 실제 살고 있는 주소가 어디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한 사람의 복수응답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RDD방식도 금력과 조직력이 큰 영향을 미친다. 여론조사를 앞두고 여유가 있는 선거본부에서는 단기 전화기를 최대한 많이 설치한다. 일명 콜센터. 여기서는 후보를 홍보하는 일도 하지만 여론조사에 응답도 한다. 무작위로 거는 전화에 당첨(?)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여론조사 응답률을 생각해보라. 연령대별로 샘플의 숫자가 할당되어 있고 숫자가 채워질 때까지 계속 조사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의지를 가지면 전화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선거본부들이 여론조사 경선 승리의 대책을 세울 때,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번 이정희 의원의 보좌관이 20~30대로 응답하라는 내용을 시사하는 문자 메시지를 돌린 것 역시 이런 맥락이다.
물론 주소가 다른 지역에 전화가 갈 수도 있다. 이번 안산단원갑 지역에서 나타난 타지역구 여론조사 응답이 이런 경우다. 안산단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런 문제는 피할 수 없다.
선거전문가들이 "이정희 의원, 똥 밟았네"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여론조사의 이런 맹점과 그동안의 선거운동 관행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본다면, 이정희 의원 보좌관이 저질렀던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선거본부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여론조사 경선 승부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기대하는 진보정당그렇다 하더라도, 국민들이 이번 사건에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사자가 다름아닌 새정치의 아이콘 이정희 의원이기 때문이다. 이정희 의원을 지지했던 국민들이 보내는 안타까움과 실망에는 구태정치를 떨쳐 버리라는 국민들의 바람이 반영되어 있다. 조직력으로 승부하는 거대정당을 이기기 위해서는 역시 조직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국민들이 진보정당에게 기대하는 것은 현실정치에 대한 능숙한 적응이 아니라, 구태와 과감하게 단절하는 새로운 정치다. 통합진보당이 원내교섭단체를 목표로 달려가면서 결별해야할 정치행태와 부득이하게 손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진보정당이 창당 초기, 정당보스가 아니라 당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당원민주주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또 이런 자부심이 소수정당임에도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국민들은 진보정당에게 기성정당보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지만 막상 그만큼의 지지는 보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중잣대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중잣대가 결국은 정치를 바꾼다. 그것이 진보정당의 씨앗이고 미래의 희망이다.
진보정당에서도 구태의연한 현실정치를 따라하는 것이 마치 전문적 능력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다면, 언제가 진보정당이 새로운 정치를 주도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국민들의 호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설령 원내교섭단체가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진보정당의 목표가 단순한 집권이나 원내 다수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구현에 있음을 믿는다.
정당 공천, 야권 경선방식 재고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