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주먹인 이 남자, 발레 하다가 결국...

[현장] 노숙인 발레단 공연 <꼬뮤니께> 연습 현장...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 얻어"

등록 2012.10.09 14:11수정 2012.10.26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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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무용수들과 노숙인 발레리노들이 한데 어우러져 공연연습을 하고 있다.
프로 무용수들과 노숙인 발레리노들이 한데 어우러져 공연연습을 하고 있다. 고재연

리허설 내내 붉은 티셔츠 입은 이들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붉은 티셔츠는 '빅이슈'의 상징 색깔이다. 안무가 제임스 전의 사인이 들어오자 그들 중 한 명이 무대 가운데로 들어가 회오리처럼 돌며 뛰기 시작했다. 정식 '발레'라고 하기엔 어색하지만 분명 그는 온몸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했다.

자신의 몫을 끝내고 나온 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는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이어 '빅이슈(Big Issue, 홈리스에게만 판매할 권한을 주어 자활의 계기를 제공하는 대중문화잡지)' 판매자 아저씨들의 투박한 몸짓과 프로 무용수들의 날렵한 몸동작이 한 데 어울리기 시작한다.

여기는 노숙인 무용수들의 세 번째 공연 '꼬뮤니께' 연습현장이다.  

 또다른 주인공 김수원씨가 안무가 제임스 전의 도움을 받으며 무대를 가로지른다.
또다른 주인공 김수원씨가 안무가 제임스 전의 도움을 받으며 무대를 가로지른다. 고재연

 발레공연 주인공 무용수가 빅이슈 아저씨의 신발끈 묶는 걸 도와주고 있다.
발레공연 주인공 무용수가 빅이슈 아저씨의 신발끈 묶는 걸 도와주고 있다. 고재연

"넘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야, 잘했어!"

현장에서 만난 빅이슈 판매원 아저씨 세 분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연습에 임했다. 자신의 파트를 놓칠까봐 다른 사람 연습때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지시가 없어도 타이밍을 놓치는 법이 없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동작이 끝나면 그제서야 쑥쓰러운 웃음을 보였다.

몸이 불편한 김수원씨는 안무가 제임스 전의 부축을 받고 무대에 들어선다. 아저씨들 사이에서도 가장 활발하고 말이 많아 '수원댁'이라 불리는 그는 무사히 무대를 가로질렀다. 김씨는 "다리가 불편해 넘어질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넘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네. 잘했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노숙인은 자신의 삶에 책임감이 없다는 편견이 무색한 순간이다.

 정식 발레리노가 된 빅이슈 아저씨들
정식 발레리노가 된 빅이슈 아저씨들서울발레시어터

온몸으로 회오리를 만드는 오현석씨와는 달리 임광진씨는 터벅터벅 걸어가다 쓰러지는 연기를 한다. 이처럼 각자 다른 몸짓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아픈 기억을 우리만의 동작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저는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의미로 회오리를 만들어내고 광진이는 쓰러지는 동작으로 표현한 거죠. 똑같이 힘들었던 기억이지만 표현방식은 다 달라요."

오현석씨의 말이다. "몸짓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임광진씨는 "추운 겨울날 술을 마시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는 상상을 한다"고 했다. 결국 임씨의 몸짓은 비틀 거리다 쓰러지고 결국은 주저앉아 버린 과거의 기억을 표현한 것이다.


 리허설을 끝내고 스트레칭 하는 모습.
리허설을 끝내고 스트레칭 하는 모습.고재연

"공연 전에는 떨려서 청심환 먹어요"

빅이슈 판매할 때의 자세나 교정하자며 얼떨결에 따라온 발레수업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서울시어터의 발레교실 덕에 김수원씨는 벌써 세 번째 공연에 선다. 김씨는 연극 <호두까기 인형>에서 '술취한 귀족' 역할을 맡기도 했다. 당시 김씨의 출연 분량은 짧았다. 그럼에도 그는 가슴이 떨려 청심환까지 먹었다.

김씨는 요즘 임광진씨에게도 "떨리면 청심환 먹으라"고 조언한다. 리허설이 끝나자 오현석씨는 물을 마시는 프로 무용수에게 가 물었다.

"선생님은 무용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요."
"어쩐지 자세가 딱 잡혀 있어요."

무용수를 바라보는 그의 부러운 눈빛에서 발레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공연 의상을 입고 프로필 촬영을 하는 모습.
공연 의상을 입고 프로필 촬영을 하는 모습.고재연

오현석씨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평소 빅이슈 판매 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레를 시작한 이후 독자들과의 대화가 한결 편해졌다. 임광진씨도 "원래 말보다는 주먹이 앞설 정도로 폭력적이었다"고 고백해 기자를 놀라게 했다. 리허설 현장을 취재하면서 그와 가장 오래 대화했지만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씨는 "이게 다 발레 덕분"이라고 했다.

김수원씨는 '무도병'(류머티즘 관련해 일어나는 질환의 하나로, 보행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라는 희귀병으로 한시도 쉬지않고 몸을 움직인다. 김씨는 발레를 처음 접하게 해준 안무가 제임스 전을 자신의 '의사'라고 소개했다. 얼떨결에 시작한 발레. 하지만 김씨는 "제임스 전과의 정서적 유대를 통해 내 병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고 말했다.

"나도 아직 뭔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공연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의 수화를 하는 임광진씨.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의 수화를 하는 임광진씨.고재연

"나도 아직 뭔가 할 수 있다"

그에게 "이번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 발레를 할 것이냐"고 물었다. 김씨는 "이번 공연을 끝으로 은퇴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이 좋은 경험을 다른 노숙인들과도 나눠야죠. 노숙인 발레 공연을 통해 더 많은 노숙인이 저처럼 자신감과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공연 중간에 수화하는 장면이 있다.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서로 위하라"라는 뜻이란다. "서로 위하라"는 이번 공연의 정신이기도 하다. 붉은 셔츠의 발레단은 이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더 많은 노숙인이 희망을 갖길 바라고 있다.

'소통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공연 <꼬뮤니께>. 이는 서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이 2010년부터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발레교육을 하면서 얻을 경험을 모티브로 창작한 작품이다.

10월 10일 서울 강동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첫 공연이 열리고, 두 번째 공연은 10월 27일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다.

서울시 지하철 6호선 안암역 사거리 인근에는 인기 많은 빅이슈 판매원이 있었다. 임진희씨인데 빅이슈를 들고 늘 사람들에게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외쳤다. 그는 이미 인근 고려대 학생들에게 유명인사다. 이날 연습현장에서는 만나지 못했지만 임씨도 이번 공연에 참여한다.

얼마전 만났을 때 임진희씨의 얼굴은 밝았다. 임씨는 요즘 강남역 6번 출구에서 빅이슈를 판매하고 있다. 문득, '임씨의 밝은 얼굴이 혹시 발레 연습 덕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리허설 연습현장을 떠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10월의 하늘이 무척 푸르렀다.

참, 빅이슈 독자는 40% 할인된 가격으로 공연을 볼 수 있단다. 빅이슈 한 권도 읽고 발레공연을 보면 일석이조의 기쁨을 누릴 듯하다. 

 꼬뮤니께 팜플렛 사진.
꼬뮤니께 팜플렛 사진.서울발레시어터

 안무가 제임스 전(검은색 옷)과 빅이슈 아저씨들.
안무가 제임스 전(검은색 옷)과 빅이슈 아저씨들.고재연

덧붙이는 글 강동아트센터 2만 원에서 5만 원까지. 과천시민회관은 전석 3만 원. 문의는 02-3442-2637.

고재연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프리덤'에서 활동합니다.
#꼬뮤니께 #노숙인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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