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0년 5월 18일 육사생도의 5.16지지 시위를 지켜보고 있다. (왼쪽부터) 박종규소령, 박정희 소장, 차지철 대위
연합뉴스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이른바 '만주인맥'이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박정희가 여순반란사건 관련 남로당 프락치로 체포돼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그를 구해 준 것은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선배였던 백선엽이었다. 그런 박정희가 5.16 쿠데타 직후 일본에서 기시 노부스케를 만났을 때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둘의 첫 만남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다.
1961년 일본을 처음 방문한 박정희는 기시에게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지사를 떠올리며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 방문 때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에게 큰절을 올린 일은 '만주인맥'들에게는 아마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후 기시 노부스케는 막후에서 한일협정 체결뿐만 아니라 박정희 시절 내내 한일관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이런 기시 노부스케에게 1970년 6월18일 일등수교훈장을 수여했다.
(<동아일보> 당시 기사 바로가기) 우리가 아베의 재집권을 우려하는 것은 단지 그가 A급 전범의 후손이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가 전범의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변국이 걱정과 우려를 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수 있다. 선대의 잘못은 후손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연좌제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선대의 악행이 그대로 후대에 전승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후손이 선조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아니, 선대의 행위가 잘못된 일이라고 자각 혹은 인식하는 일조차 쉽지가 않다.
만약에 A급 전범의 손자인 아베가 일본의 과거사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평범한 정치인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과거청산과 피해배상에 나선다면, 아마도 'A급 전범의 후손 아베'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아베는 그와는 정반대, 즉 우리의 세속적인 우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A급 전범'의 후손 아베와 박정희의 딸 박근혜 아베의 사명은 헌법 개정이다. 그의 외조부였던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시절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과 일본식 자주국방을 추진하기도 했으니, 일종의 가업인 셈이다. 아베는 지난 2006년 선거에 나섰을 때도 개헌을 중요한 공약으로 내세웠다. 오는 12월16일 총선을 앞두고 아베 자민당 신임총재는 전쟁 및 군대보유를 금지한 현행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해 국방군을 보유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공약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공약들이 과거사를 부정하는 아베의 태도와 결부돼 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아베는 미흡하나마 과거사에 대해 반성적인 내용을 담은 이전 총리들의 담화(고노 담화 등)를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가 하면 다케시마의 날을 정부행사로 격상시키며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외국 홍보를 강화한다는 공약도 발표했다. 역시 A급 전범의 후손다운, 가히 극우공약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인 아베 총재(총선 승리로 총리가 확실시되는)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불편한 또 하나의 이유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A급 전범 기시에게 외교훈장까지 수여했던 박정희의 딸이 한국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벌써부터 이 '독재자의 딸'에 관심이 많다. <뉴욕타임스>는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썼고, 영국의 BBC는 한국의 이번 대통령 선거를 "독재자의 딸과 인권변호사의 대결"로 보도했다.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보도한 언론은 르몽드, 로이터, AP, AFT 등 유수 언론사를 망라한다.
(관련기사: <로이터>도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로 표현)이렇게 외신들이 잇따라 약속이나 한 듯이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쓴 것은 'A급 전범의 손자 아베'를 바라보는 우리의 걱정스런 시선과 똑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만약 박근혜가 부친의 잘못된 과거사를 올바른 역사관으로 똑바로 직시하고 그 물줄기를 제대로 돌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해 왔다면, '독재자의 딸'이라는 외신들의 호칭은 오히려 존경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박근혜의 길은 아베의 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베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박근혜는 여전히 5.16 쿠데타 혹은 유신체제가 '잘못된 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에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보상'(국가배상이 아닌)만 말할 뿐이다. 가해행위가 역사의 죄악이라는 자각이 없는 셈이다.
야당 후보에게 연일 NLL사수 의지가 있는지를 묻는 박근혜는 정작 권력찬탈을 위해 해병대와 특전사는 물론 휴전선을 지키던 포병부대를 서울로 끌어들인 자기 부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옹호한다. 야당정부는 이념논쟁만 일삼는다는 '이념공세'가 다시 되살아났다. 경제민주화나 재벌개혁도 은근슬쩍 사라져 버렸다. 쇄신의 화장발이 거추장스러웠던지 이제는 완전히 '70스타일'로 돌아간 느낌이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외신기사 제목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편치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동북아에 '만주인맥' 다시 부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