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마크1980년대 초, 군 생활을 하며 군복 어깨에 달고 다녔던 소속부대인 1군사령부 부대마크를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도길
"군의관님, 제가 죽을 수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부모님 얼굴을 보고 싶으니 집에 연락해주셨으면 합니다."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군 병원에 입원한 나에게 군의관은 "집에 연락할까"라는 짤막한 물음을 던졌다. 위의 말은 그에 대한 나의 애절한 소망이 담긴 답변이다. 이어 군의관과 나의 대화는 잠시 이어졌다.
"죽을 정도로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야. 치료만 잘 하면 나을 수 있어.""그렇다면 집에 연락하지 말았으면 합니다.""왜 연락하지 말라는 거지? 부모님께 알려야 하지 않겠나?""완치가 가능하다면 굳이 부모님께 연락해서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거제도에서 원주까지 거리도 멀고, 오는 내내 근심걱정 가득하실 부모님이 오히려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다.""정 하사, 부모님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네. 알았어. 연락하지 않고, 치료 잘 할게."제대를 10개월 앞둔 1982년 10월 31일 새벽. '잊혀진 계절'처럼 시월의 마지막 밤은 내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다. 단지, 그날 아침 그 고통이 다가올 줄을 미처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시월의 마지막 날 아침. 전날 숙박한 강원도 홍천에서 군용 지프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인제로 향했다. 당시 특수임무를 띠고 야외활동을 하던 때라 강원도 전역이 나의 근무지였다. 굽이굽이 진 산악도로로 들어서자, 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로 신작로는 큰 돌멩이로 빼곡했다. 거기에다 때 이르게 내린 눈은 차의 진로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 50m 급경사 눈밭을 기어올라S자 모양으로 굽이진 도로를 회전하는 순간 차량의 바퀴는 밀리는 듯했고,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는 순간 중심을 잃은 차머리는 절벽으로 향했다. '찰나'는 이런 때 쓰는 용어일까. 순간에 벌어진 일은 인간의 기억을 삭제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프는 50m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다 큰 소나무에 걸렸고, 책임자인 중사와 운전병 그리고 나는 비닐 카버로 된 차창 밖으로 튕겨져 나와버렸다.
"정 하사! 우리가 여기 뭐 하러 왔지? 뭐 하러 왔어?""…."두 팔과 두 발로 기다시피 도로에 먼저 올라간 중사는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운전병도 저 멀리 가물가물 희미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추위와 고통에 정신을 차릴 즈음, 손으로 얼굴을 훔쳐보니, 그제야 내가 피투성이가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게 마음의 고통이라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암흑에만 공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덜컥 겁이 났다. 다시 새로운 정신이 들었을 때 중사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기억을 잃을까봐, 그래서 기억을 되살려주려는 배려였던 셈이었다.
쌓인 눈은 손바닥을 얼게 했고, 신경을 마비시켰다. 설원에서, 목숨을 건 진한 영화보다 더 진한 장면의 주인공이 돼버린 나. 오직 '살아야만 되겠다'는 의지 하나만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50m 돌밭으로 된 급경사를 '네 발'로 기어오르는 데, 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단 하나 투철한 군인정신(?)만을 가진 채.
세상은 참으로 비정하고 무정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도로변에 올라서자 살을 에는 추위는 저체온증으로 빠져들게 했다. 다행히 중사와 운전병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기에, 추위에 사시나무 떨 듯 하는 나를 돌봤지만, 더 나아질 리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트럭 한 대가 경사진 길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일행이 손을 들고 태워달라고 요청했다. 피투성이가 된 나를 보고 겁을 먹었는지, 그냥 지나치는 트럭. 야속하고 원망 가득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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