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껠라컨이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과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영란
"씰리펀은 왜 그렇게 오래 공부해?"
아짠 껠라컨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많다. 학생들 앞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아짠(선생님), 학교 아닌 데서는 으아이(언니), 내가 장난을 치거나 어린애 같아 보이면 씰리펀(복길이). 근데 이 씰리펀은 그게 아니다. 아짠은 가끔 한국인 여자, 나란 사람 자체에 대해서 물을 때도 진지하게 씰리펀을 부른다.
"아짠도 오래 공부했고, 오래 공부할 거잖아."내가 그렇게 진지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을 리가, 그저 아짠이 공부하는 이유와 같지 않겠느냐는 반문 같은 대답으로 가름했다.
아짠 껠라컨은 별명이 없다. 내가 라오스에서 별명을 부를만한 사이에 있는 사람들 중에 별명이 없는 사람은 오로지 그 아짠 한 명뿐이다. 아짠은 둘째지만 어렸을 때부터 오빠 대신 가장의 역할을 해온 것 같다. 아짠은 결혼해서도 할머니와 어머니가 사는 집에 그대로 살면서 역시 함께 사는 여동생 내외까지 보살펴왔다. 2009년 내가 월세 살던 집 뒤쪽에 새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아짠과 남편, 아들 뱅(bank를 라오스 식으로 읽어서 지은 별명이다)만의 공간이 생겼지만 잠자는 것을 빼면 가족들 건사하느라 여전히 옛집에 들이는 시간이 더 많다. 굳이 가장의 짐이 아니어도 라오스 여자들의 삶은 힘겹다.
아짠은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수립되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2년에 태어났다. 아짠은 그 곤궁했던 시절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우리 어머니들의 한 같은 것이 서렸을지도 모른다. 아짠이 저녁이면 심취해서 보는 타이 드라마(타이의 글자는 몰라도 말은 대부분의 라오스 사람들이 잘 알아듣는다)가 있다. 주인공 아버지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전화기 한 대로 손님들에게 통화를 할 수 있게 해주고 돈을 받는 노점을 이용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신기해하며 저게 언제적 이야기냐고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높일 요량으로 변죽을 울렸는데 아짠은 한동안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니 그저 옛날이라고만 대답했다. 물색모르고 내가 언제쯤이냐고 재차 물었더니 아짠이 중등학교 다닐 때 저 일을 했노라고 했다. 학교를 마치면 매일 집안일부터 돈 버는 일까지 도맡아 했어야했고 어떤 때는 학교를 아예 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고 쓸쓸하게 덧붙였다. 아짠이 별명이 없었던 건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부모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아짠 껠라컨의 연꽃 같은 꿈 아짠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상하기 쉬운 반찬들을 서둘러 만든다.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어젯밤에 만들어 두었던 반찬들까지 모두 챙겨서 시장으로 간다. 아짠이 학교에 가거나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울 땐 할머니나 어머니가 보시는 좌판에 가져온 음식들을 벌여놓는다. 7시가 넘으면 두 분 중 한 분하고 교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서둘러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씬(라오스 전통 치마, 여성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꼭 씬을 입어야 한다)을 다려 입고 8시 출근을 한다. 지난해에는 집 옆에 논에서 농사까지 지었다. 올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쉰단다.
아짠은 영어교사다. 라오스는 영어가 주요과목이 아니어서 수업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아짠은 영어교과 대표교사로 아직 수습교사들이 많은 다른 영어 아짠들을 도와 주어야한다. 딱히 전공자가 없는 기술과목을 가르치기도 한다. 아짠은 또 청소년 특별활동 지도교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교 행사가 있으면 아짠이 대부분 일을 맡는다. 또 아짠은 학교에서 제일 일이 많은 청년단 대표이다. 정기적으로 청년단 소속 학생과 아짠들과 회의를 갖고 각종 활동을 수행하고 책임져야 한다. 2011년 새로이 컴퓨터가 정규과목(요즘은 ITC라고 부른다)이 되고 담당교사가 부임하기 전까지 아짠은 컴퓨터 수업까지 맡았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수업이 끝나면 퇴근한다. 집으로가 땀에 절은 몸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시장으로 가 그동안 좌판을 지키고 계셨을 할머니나 어머니하고 교대한다. 틈틈이 내일 팔 반찬 재료들을 주변 야채 좌판이나 가게들에서 사둔다. 오후 6시 무렵 시장이 닫으면 할머니 집으로 간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할머니 집에 와 있는 뱅도 보고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일 시장에 내다팔 음식들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