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에 반찬 만드는 영어교사의 삶, 짠하다

[기획 - 메콩의 햇빛⑩] 라오스 여성 가장의 고단한 일상과 꿈

등록 2013.05.28 18:08수정 2013.05.2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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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착한여행과 함께 라오스 산간학교에 햇빛발전을 지원하는 공동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2009년부터 꾸준히 라오스 산간학교에 태양광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소수민족이 사는 메콩강 유역 산간 학교 학생들은 하루에 10km이상 걸어서 학교에 가기도 합니다. 이들 산간학교 기숙사에 지원되는 태양광 시스템은 아이들이 안정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라오스 산간학교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햇볕발전 이야기에 오마이뉴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에서 노시인이 읊은 시구다. 주인공 배우의 이 낭독 부분에서 나는 영화가 의도한 그대로 노시인의 젊음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욕망을 절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단원으로 훈련받던 때가 생각났다.

초록색이 분노한 이유

그 시간의 제목은 기아체험이었다. 아침, 점심 두 끼를 굶는 게 고작이었지만 이른 새벽 5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보에서부터 꼬박 12시간의 강의와 훈련은 예비단원들을 절대 기아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지치고 허기지게 만들었다. 오후 6시, 절로 꼬부라지는 허리를 가까스로 세우며 밥을 먹으러 들어가려는데 교관들이 제비를 뽑으라며 식당 입구에 서 있다. 이건 또 뭔 훈련인가 싶어 시키는 대로 제비를 뽑았는데 나는 노란색이다. 가장 많은 이들이 뽑은 색깔이어서 일단 안심. 그 다음은 초록색. 가장 적은 숫자가 빨간색 제비였다. 교관들은 단원들이 뽑은 제비의 색깔에 따라 서로 다른 자리를 안내했다.

노란색들에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판이 주어지고 똑같이 배식이 이루어졌다. 노란색들은 별 생각 없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데 초록색들 쪽이 잠깐 술렁이는가싶더니 곧 고함 같이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초록색들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죽 한 그릇. 게다가 양도 상당히 적어 보였는데 먹어보니 맛까지 좀 이상했던 거였다. 초록색들을 분노할 정도로 흥분시킨 이유는 또 있었다. 그런 초록색들에겐 노란색도 무척 부러울 판인데, 거기에 기름을 부어 호사스런 빨간색들의 식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소수인 빨간색들에게는 수놓은 식탁보에 꽃, 와인까지 곁들여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먹는 양식이 제공됐던 것이다. 훈련의 일환이고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었기 망정이지 그때 초록색들의 분기탱천함을 보면, 만약 한 끼라도 더 굶었거나 한번이라도 더 그렇게 천지차이의 식사가 제공될 거였더라면 혁명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그 훈련의 목표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너희가 부자 나라에서 난 것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가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1982년에 태어난 그녀가 가장으로 살아가는 이유 

 아짠 껠라컨이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과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아짠 껠라컨이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과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영란

"씰리펀은 왜 그렇게 오래 공부해?"


아짠 껠라컨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많다. 학생들 앞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아짠(선생님), 학교 아닌 데서는 으아이(언니), 내가 장난을 치거나 어린애 같아 보이면 씰리펀(복길이). 근데 이 씰리펀은 그게 아니다. 아짠은 가끔 한국인 여자, 나란 사람 자체에 대해서 물을 때도 진지하게 씰리펀을 부른다.

"아짠도 오래 공부했고, 오래 공부할 거잖아."

내가 그렇게 진지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을 리가, 그저 아짠이 공부하는 이유와 같지 않겠느냐는 반문 같은 대답으로 가름했다.

아짠 껠라컨은 별명이 없다. 내가 라오스에서 별명을 부를만한 사이에 있는 사람들 중에 별명이 없는 사람은 오로지 그 아짠 한 명뿐이다. 아짠은 둘째지만 어렸을 때부터 오빠 대신 가장의 역할을 해온 것 같다. 아짠은 결혼해서도 할머니와 어머니가 사는 집에 그대로 살면서 역시 함께 사는 여동생 내외까지 보살펴왔다. 2009년 내가 월세 살던 집 뒤쪽에 새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아짠과 남편, 아들 뱅(bank를 라오스 식으로 읽어서 지은 별명이다)만의 공간이 생겼지만 잠자는 것을 빼면 가족들 건사하느라 여전히 옛집에 들이는 시간이 더 많다. 굳이 가장의 짐이 아니어도 라오스 여자들의 삶은 힘겹다.

아짠은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수립되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2년에 태어났다. 아짠은 그 곤궁했던 시절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우리 어머니들의 한 같은 것이 서렸을지도 모른다. 아짠이 저녁이면 심취해서 보는 타이 드라마(타이의 글자는 몰라도 말은 대부분의 라오스 사람들이 잘 알아듣는다)가 있다. 주인공 아버지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전화기 한 대로 손님들에게 통화를 할 수 있게 해주고 돈을 받는 노점을 이용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신기해하며 저게 언제적 이야기냐고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높일 요량으로 변죽을 울렸는데 아짠은 한동안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니 그저 옛날이라고만 대답했다. 물색모르고 내가 언제쯤이냐고 재차 물었더니 아짠이 중등학교 다닐 때 저 일을 했노라고 했다. 학교를 마치면 매일 집안일부터 돈 버는 일까지 도맡아 했어야했고 어떤 때는 학교를 아예 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고 쓸쓸하게 덧붙였다. 아짠이 별명이 없었던 건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부모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아짠 껠라컨의 연꽃 같은 꿈  

아짠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상하기 쉬운 반찬들을 서둘러 만든다.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어젯밤에 만들어 두었던 반찬들까지 모두 챙겨서 시장으로 간다. 아짠이 학교에 가거나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울 땐 할머니나 어머니가 보시는 좌판에 가져온 음식들을 벌여놓는다. 7시가 넘으면 두 분 중 한 분하고 교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서둘러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씬(라오스 전통 치마, 여성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꼭 씬을 입어야 한다)을 다려 입고 8시 출근을 한다. 지난해에는 집 옆에 논에서 농사까지 지었다. 올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쉰단다.
  
아짠은 영어교사다. 라오스는 영어가 주요과목이 아니어서 수업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아짠은 영어교과 대표교사로 아직 수습교사들이 많은 다른 영어 아짠들을 도와 주어야한다. 딱히 전공자가 없는 기술과목을 가르치기도 한다. 아짠은 또 청소년 특별활동 지도교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교 행사가 있으면 아짠이 대부분 일을 맡는다. 또 아짠은 학교에서 제일 일이 많은 청년단 대표이다. 정기적으로 청년단 소속 학생과 아짠들과 회의를 갖고 각종 활동을 수행하고 책임져야 한다. 2011년 새로이 컴퓨터가 정규과목(요즘은 ITC라고 부른다)이 되고 담당교사가 부임하기 전까지 아짠은 컴퓨터 수업까지 맡았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수업이 끝나면 퇴근한다. 집으로가 땀에 절은 몸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시장으로 가 그동안 좌판을 지키고 계셨을 할머니나 어머니하고 교대한다. 틈틈이 내일 팔 반찬 재료들을 주변 야채 좌판이나 가게들에서 사둔다. 오후 6시 무렵 시장이 닫으면 할머니 집으로 간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할머니 집에 와 있는 뱅도 보고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일 시장에 내다팔 음식들을 만든다.

 껠라컨은 복권 파는 일까지 시작했다. 화요일 금요일 저녁이면 이렇게 길가에서 전등을 켜고 붝권을 판다.
껠라컨은 복권 파는 일까지 시작했다. 화요일 금요일 저녁이면 이렇게 길가에서 전등을 켜고 붝권을 판다. 이영란

가끔 그냥 할머니 집에서 저녁을 먹기도 한다. 그러면 오후 10시가 넘어서 새벽에 만들어야 하는 반찬거리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또 이런저런 집안일, 학교일 등을 하고 자정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올해 들어 매주 화요일 금요일엔 복권을 파는 일까지 시작했다. 또 장바구니처럼 큼직한 가방엔 방문판매하는 화장품들까지 들어있다. 고단하기 그지없는 일상이다.
 
지난 3년 동안 아짠은 방학(라오스에는 겨울방학이 없다. 보통 초중등학교는 우기인 6,7,8월 꼬박 석 달 간의 방학을 갖는다)마다 루앙파방에 가서 공부했다. 교사 재교육과 함께 현재 대부분 학위가 없는 교사들에게 학위를 수여할 목적으로 개설된 과정이다. 아짠은 지난여름 이를 수료하고 영어교육학 학위를 받았다. 아짠 껠라컨 말고도 많은 아짠들이 학위를 받기를 원한다. 학위를 받으면 학위가 없을 때보다 월급이 두 배로 뛰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많은 아짠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로 학위를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 아짠 껠라컨은 해냈다. 그 고단한 일상이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서도 말이다. 그것도 아주 충실히. 

"나는 내 일 더 잘 하고 싶고, 더 많은 것에 대해 알고 싶고, 더 넓은 세상 보고 싶어."

아짠은 자기가 영어교사인데 영어도 씰리펀보다 못하고(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나이가 많아도 오래 공부하고 일하는데 자기는 쉬고만 싶다고(당연히 그럴 만하지 않은가!) 한숨짓더니, 마지막에 장학금 받아서 오스트레일리아로 공부하러 가고 싶다며 이런 꿈의 말을 덧붙였다.

그래, 사람을 만나면 서로를 꿈꾸게 되지. 서로 네가 되어보는. 그런데 내가 네가 되어보는 꿈을 꾼 적이 있나? 내가 너라면 과연 너처럼 그렇게 열심히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내겐 그저 아짠이 연꽃만 같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이자 <싸바이디 라오스> 저자입니다.
#라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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