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남양유업남양유업 영업사원이 대리점 사장에게 폭언하는 녹취음성이 공개되면서 여론의 거센 비판이 불매운동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9일 오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센터에서 김웅 대표이사와 본부장 이상 간부들이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하며 고개숙이고 있다.
권우성
이제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위 사건들이 우리를 분노케 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해자가 황급히 사과한 이유와 같을 것이다.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감에 불타는 국민인 탓에, 약자를 괴롭히는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던 것일까.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늘 정의로운 국민은 아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불의에 눈감아왔을 뿐 아니라, 직접 나서서 악행에 참여하기도 했다. 우리는 대한항공에 탑승한 포스코 고위인사의 몰상식한 요구, 무례, 폭언, 폭행에 경악했지만, '진상짓'은 일부 권력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실은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의 2011년 설문조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서비스직 종사자 중 폭언으로 고통 받은 사람이 30% 이었고, 무려 40%가 인격을 무시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로 인해 4명 가운데 1 명 이상이 치료가 필요한 중증 혹은 고도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한국의 서비스직 종사자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일반 노동자의 두 배에 달한다.
생계를 무기 삼아 남을 쥐어 짜는 악습은 일부 계층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잇달아 터진 사건의 주역들이 힘있는 사람들이었던 탓에 '그들의 문제'처럼 인식되었을 뿐이다. '적'과 '아군'이 뚜렷이 구분되었기에 손가락질하기도 쉬웠다. 이런 우리의 정의감이 얼마나 허술하게 작동하는지 보자.
지난 5월 초,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 한국을 강타했을 무렵, 남양유업 불매운동이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이 두 가지 소식으로 도배된 것은 당연했다. 윤창중 경질, 기자회견, 새로운 혐의 발견 등 핵폭탄급 뉴스가 초를 다투며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조용히 주목 받는 뉴스가 있었다.
'이건희·이부진 부녀, 대학생이 닮고 싶은 최고경영자 1위'남양유업 본사 앞에 남양유업 제품이 버려져 쌓이고, 상점 입구에 '악덕기업 남양우유 제품을 팔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나붙고,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은 주식을 팔고 잠적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 때였다. 바로 그 시간에 이건희 회장은 미국을 방문한 대통령과 함께 만찬에 참석하고 있었고, 한국 대학생들에 의해 '닮고싶은 경영자 1위'로 꼽혔다.
대학생들만이 아니다. 며칠 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재벌총수 선호도' 조사에서도 이건희 회장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남양 회장과 삼성 회장의 엇갈린 팔자는 대통령 순방 때 대변인이 성추행을 저지르고 도망 온 것만큼이나 초현실적으로 보였다.
'악덕업자'와 '닮고 싶은 경영자'의 차이 남양유업은 욕 먹어 마땅한 일을 했고,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남양과 삼성이 받는 대접의 차이는 그다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삼성이 저질러 온 일은 약자를 모욕하고 위협한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삼성은 2008년 태안 기름유출로 수많은 어민들의 삶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절망한 어민 여럿이 목숨을 끊었다. 삼성 반도체와 액정화면 공장에서 암으로 사망한 노동자는 50명이 넘지만, 삼성은 개인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해 왔다.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직원 가운데 오직 2명만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