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도 힘들어?" 명절에 대한 남자들의 의문

[여자의 명절②] 불편한 걸 불편한 줄 모르는 남편들에게

등록 2018.02.14 17:14수정 2018.11.0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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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명절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여자의 명절’과 ‘남자의 명절’, ‘부부의 명절’ 기획을 통해 어떻게 하면 보다 성평등한 명절을 보낼 수 있을지 모색해 봅니다. [편집자말]
얼마 전 친구를 만났다. 친구 부부는 아기 계획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2, 3년 후에 아기를 낳을 생각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최소한 열 번은 넘게 시부모님께도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자꾸 전화를 걸어 '아기는 언제 낳을 거니?'라고 수시로 물어보신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싫은 티를 냈다가 싸움이 되고 결국 쌓인 것들이 폭발했는데, 이후 화해하면서 남편이 뜻밖의 말을 했다고 한다.


"난 네가 우리 엄마 때문에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줄 몰랐어."

말로만 듣던 시댁 스트레스가 내 아내에게도 있긴 있겠지만 가벼운 정도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 친구의 스트레스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나로서도 의외의 반응이었다.

시어머니의 요구와 간섭이 명백히 보통 이상인데, 그걸 몰랐다고? 비단 이 부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내는 시부모님의 지나친 간섭과 요구에 점점 더 힘들고 지쳐 가는데, 왜 남편은 그걸 눈치채지 못할까?

아마 으레 하는 투정이라고 생각해서, 시댁이라는 이유로 별것 아닌 걸로도 불편해한다고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며느리들이 시댁이라는 이유로 필요 이상 불편해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누구나 불편해할 만한 일들이 시부모님과 며느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불편한 걸 불편한 줄 모른다니


 설연휴를 1주일 앞둔 8일 서울시 중구 남대문 한복 상점을 찾은 시민들이 다양한 종류의 한복을 살펴보고 있다
설연휴를 1주일 앞둔 8일 서울시 중구 남대문 한복 상점을 찾은 시민들이 다양한 종류의 한복을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결혼 후 몇 번의 명절을 거치는 동안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말로만 듣던, 드라마에서만 보던, 커뮤니티에서만 들려오던 '불편한 멘트'들이 실제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 때는 명절에 친정집 가는 건 꿈도 못 꿨다."
"우리 아들은 설거지 한번 안 시키고 귀하게 키웠어."
"장손이 대를 이어야지, 애를 왜 안 낳아?"



그 모든 말들이 날을 세워 공격적으로 나에게 박힌 것은 물론 아니었다.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마치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처럼, 또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흘리듯 툭툭 지나간 문장들이었다. 대화 사이사이에 너무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서 나 말고는 아무도 그 말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남편이 무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 집의 며느리라는 포지션이 되어 불편한 멘트에 노출되어 마음을 다친 나를 당연히 그가 다독여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평소에 두 사람 사이에서 그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할 때면 결국 진심으로 사과했던 것처럼.

하지만 남편은 한동안 딴소리만 했다. 그가 괜히 민망해서 그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내가 들었던 말을 이미 다 잊어버렸거나 애초에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결국 "내가 들은 얘기에 대해서 뭔가 할 말은 없어?" 하니까 그는 "어른들이 그냥 한 소리야, 신경 쓰지 마"라고 틀에 박힌 듯 뻔한 답변을 했다. 그쯤에서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어른들이 별 생각 없이 한 말을 혼자 나쁘게 받아들이는 예민한 며느리가 됐구나.

어른들이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내가 일일이 대항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어른들의 생각을 내가 다 바꿀 수는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으니까.

다만 시댁에서 나의 지위가 하락한 듯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 그가 적어도 '공감'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 말 들어서 불편했지?" 한 마디만 했더라도 나는 아마 괜찮았을 것이다.

명절에 대한 서로 다른 욕구

 웹툰 <며느라기>의 한 장면
웹툰 <며느라기>의 한 장면<며느라기>

결혼 후 나는 우리 집 대신 시댁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차례를 지낸다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지만, 남편에게 명절 풍경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집에 내려갈 때 옆에 아내를 태우고 간다는 점만 추가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명절 전날 본가에 가고, 그곳에서 엄마와 작은엄마들이 음식을 만들고, 아빠와 아빠 형제들과 함께 절을 한다.

그는 그 모습이 불편하다는 생각을 적어도 날 만나기 이전까지는 떠올려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명절이면 허리가 아프고 피곤한 엄마의 사정이 언젠가 '내 일'이 되리라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명절은 적어도 오랜만에 친척들이 만나 얼굴 보고 안부도 묻는 화기애애한 날이었다. 그 자리에 따라온 여자들은 서로 피가 통한 것도 아닌데, 매번 부엌에서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는 건 그의 사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언젠가 '내 일'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결혼 후 명절이 싫어졌다. 남편은 내가 당장 시댁에서 요리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명절을 꺼리는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남녀의 역할이 따로 정해져 있는 명절 풍경, 그 안에서 며느리라는 약자의 지위를 갖는 것이 불편하다는 걸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는 게 나로서는 더 이해가 안 됐다.

물론 한편으로는 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친척 어른들을 소개해 주고, 이제 큰 범위의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화기애애한 명절을 보내길 바라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친정으로 가는 식으로는 평생 명절에는 만날 수 없는 남동생을 만나 명절 인사를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음식을 준비하거나 뒷정리를 하는 게 내가 아니기만 하다면. 그 점을 이해받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이건 여자들의 싸움이 아니다

일 년에 겨우 두 번 있는 명절, 거기서 여자들이 입을 다물면 명절은 지금까지처럼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롭게 지속될 것이다. 어쩌면 이 안의 불평등을 알고 있는 남편들도 일 년에 두 번뿐이니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춰주기를, 조금만 견디고 참아주기를 내심 바라는 듯하다. 때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종용하기도 한다.

"일 년에 두 번인데, 그것도 못 참아?"

그런 무신경한 질문은 갈등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적어도 이 불평등함에 대해 인식하는 것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결혼 제도의 어려움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몫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여자의 적은 여자, '여적여'의 프레임을 씌워 그들만의 싸움으로 선을 긋고, 남자들이 한 발 물러서 버리면 명절은 매번 부부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갈등의 원흉이 되어버릴 뿐이다.

얼마 전,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겠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런 것까지 불편해?'라고 묻지 않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묻거나, '별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 길고 끝없는 갈등의 출구는 멀어진다.

적어도 여자들이 명절을 왜 싫어하는지, 왜 명절이 불편한지 적어도 진심으로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명절의 풍경이 실은 누군가의 희생을 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성인이라면 자연히 명절 풍경은 조금 더 합리적으로, 또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결론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기득권층은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불편을 바로잡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여성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학대인 줄도 모르고 학대에 방치되는 동물들, 불편함을 겪는 장애인들의 문제에 우리들 역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어떤 집단에서 약자가 될 수 있다. 다른 이의 부당한 처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도 나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싸워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예민한 아내이자 며느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뭘 이런 것까지 불편해 하느냐'는 것까지 불편해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하고 확실한 의사 표현이기 때문이다.
#명절 #며느리 #시어머니 #남편 #가부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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