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고백부부> 한 장면
KBS <고백부부>
전업주부에겐 발언권이 없다 아이를 낳고 나는 집에 있는 주부가 됐다. 이제껏 성실히 살아왔고 맡겨진 임무에도 열심이었던 나였지만 '주부가 되었으니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라'라는 소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가슴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곤 했다.
집안일, 싫은 건 아니다. 살림꾼처럼 집안을 쓸고 닦고 물건을 착착 제자리에 정리하며 보람차기도 했다. 주부가 되고 청소는 나의 가장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기도 하다. 이 역할에 안착해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울렁울렁 저항이 일었다.
임금 노동을 하지 않을 경우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전업주부'를 호명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가사 분업 논쟁에서 전업주부는 아예 발언권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맞벌이라면 나눠서 해야 한다.' 모든 전제엔 '맞벌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으며 전업주부는 완전히 논외 밖으로 밀려났다. 수익을 내는 경제적 활동에서 지워진 존재는 어디에서도 지워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육아는 같이할 수 있어도 가사는 전업주부 몫이라는 말을 들으며 '아이에게 밥 차려주기는 육아일까, 가사일까' 궁금해졌다. 집에 있는 사람은 식구들이 흘리고 다니는 쓰레기를 치우고 마시고 난 컵을 씻어주는 것이 마땅한지, 돈 벌어오는 사람은 설거지도 하면 안 되는지,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밥과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쫄쫄 굶고 있는 남편을 보며 '주부는 대체 무언지' 묻고 싶었다. 밥해주는 사람? 청소해주는 사람?
집에 있는 주부가 집안일에 좀 더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있지만 한 공간에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고 있는데, 음식을 하고 치우는 모든 일을 한 사람이 전담하는 몫이라 할 수 있을까? '전업주부'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한다.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돈도 못 버는데 그거라도 해야지'라는 내면의 명령을 당차게 거부할 용기도, 표현할 말도 없었다.
전업주부에겐 사회적 자아가 없다 나는 오로지 육아, 가사만 하는 '전업주부' 기간을 3년 가까이 겪었다. '자아실현과 능력 발휘'가 인생 최고 가치라고 믿고 살아왔기에, 어쩌다 되어버린 '전업주부'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까 불안하고 초조했으며 도태되는 기분을 수시로 겪었다.
이제는 안다. 전업주부 역시 노동 불안정성이 파다한 다른 직업처럼 평생직업과는 거리가 먼 임시직이며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언젠가 남편도 지금 나의 자리에 올 수 있음을. 돈을 벌지 못한다거나 직장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구성원 그 누구라도 '전업주부 되기'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알게 되며 억울함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래도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아이에게 받는 기쁨과 청소할 때의 개운함, 그리고 딱 그만큼 집안일의 지루함과 육아라는 극한 노동이 주는 육체적 피로를 오고 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별개로 다른 차원의 무기력함과 갑갑증이 수시로 나를 옭아맸다. 한동안은 이런 기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바깥일에 더 적합한 사람인데 집에 어쩔 수 없이 가두어졌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해명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예전, 오로지 집과 회사만을 오고 갈 때 느꼈던 '내'가 사라진 기분과 비슷했다. 우리는 통상 무엇으로도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한 '자아'가 있다고 믿지만 그런 자아란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 관계 속의 나, 사회 속에서의 나'라는 여러 개의 나의 '집합체'이다.
회사 다닐 때 사라진 건 '진짜 나'라기보다 '또 다른 나'가 될 수 있는 여지였다. 누군가의 친구로서 나, 책 읽기와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나... 내가 '일하는 기계' 이외에 다른 내가 될 수 없음에 숨이 턱턱 막혔다.
주부가 되어 집에 있으며 잃어버린 '나'도 '본질적인 나'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잃어버리고 쪼그라들어버린 나였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이 하나씩 없어지면서, 좁디좁은 3인 가족 안에 나를 위치시키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수많은 '나'로 구성되어야 할 '나'의 어느 한 벽면이 허물어진 것 같았다. 사회적 인정 속에 자신을 소모하며 살아도 안 되지만, 사회적 인정 없이 살기도 쉽지 않다.
전업주부, 직업은 아니지만 직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