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뭔가에 홀린 듯 코바늘과 그 옆에 놓인 실까지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코바늘 덕질'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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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뜬금없는 시작이었다. 이런 걸 '덕통사고'(갑자기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 교통사고와 비슷하다는 의미의 신조어)라고 부르나 싶을 정도였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퇴근길, 1000원에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마트에 들렀다. 가방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이어폰을 넣어 다닐 작은 주머니를 사기 위해서였다. 5분이면 사고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꽤 오래 고민했던 것 같다.
사이즈가 적당하면 모양이 안 예쁘고, 예쁜 주머니는 너무 작거나 너무 컸다. 같은 코너를 빙글빙글 돌면서 주머니를 고르던 내 눈에 갑자기 길고 뾰족한, 끝이 살짝 굽은 바늘이 딱 들어왔다. 뜨개질을 하는 '코바늘'이었다.
사실 눈에 띈 것은 바늘이라기보다 바늘의 포장지였다. 겉면에 그려진 이미지가 딱 내가 원하던 주머니의 크기와 색깔이었다(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건 주머니가 아니었다). 이 바늘로 이 주머니를 만들 수 있다는 걸까.
뜨개질이라고는 고등학교 <기술·가정> 시간에 대바늘로 목도리를 뜨다가 실패한 게 경험의 전부였던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코바늘과 그 옆에 놓인 실까지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코바늘 덕질'의 시작이었다.
내가 코바늘 뜨개질을 시작했다고 고백하면 주변 사람들은 백이면 백 "네가?"라고 코웃음 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알아주는 '마이너스의 손'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실과> 시간에 수행평가로 만들었던 반바지는 분명히 도안대로, 선생님이 시키는 그대로 했는데 양쪽 다리가 다 들어가지 않았다.
만들기나 DIY는 고사하고, 내 손은 멀쩡한 기성품도 수일 안에 망가뜨리는 재주가 있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내 손에서 망가진 마우스만 몇 개였더라. 휴대폰은 늘 약정기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리퍼'를 거듭해야 했다. 그런 내가 무려 '뜨개질'이라니 주변 사람들이 놀랄 법도 했다.
유튜브 선생님, 왜 저는 안 되는 거죠
어찌 됐든 칼을 빼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듯이, 코바늘을 사들였으면 한 코라도 떠봐야 하는 것 아닌가. 집으로 돌아와 유튜브에서 '코바늘 주머니' 영상을 하나 찾아 틀어놓은 다음 드디어 뜨개질을 시작했다.
바늘을 이리저리 움직여 실을 꿰는데 스스로도 정말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친절한 유튜브 선생님들은 광고 15초의 저렴한 수업료만으로 어떤 실을 바늘에 어떻게 감아야 주머니를 만들 수 있는지 하나하나 천천히 가르쳐주셨지만, 나는 그걸 따라가는 것조차 벅찰 만큼 심각한 열등생이었다.
자꾸만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일단 힘 조절이 안 돼서 모양이 구불구불 제멋대로였고 곳곳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분명히 20코로 시작했는데 다다음 줄에 세어 보니 24코가 돼 있었다.
'이걸 대체 왜 하고 있는 거야.'
'이럴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영어 공부를 하든가, 운동을 하든가.'
'지금이라도 때려치울까...'
손은 움직이고 있지만 머리로는 각종 상념이 똬리를 틀었다. 내 '코바늘 덕통사고'는 이렇게 하루 만에 사건 종료인 줄 알았다.
다음날 퇴근길 다시 1000원짜리 물건들을 파는 마트에 갔다.
'그래, 내가 무슨 뜨개질이야. 이어폰 주머니가 뭐라고. 대충 담을 수만 있으면 되지.'
하지만 나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시 둘러봐도 진열대에 놓인 기성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에 드는 주머니 모양을 봐버린 이상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다시 바늘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방향을 틀었다. 나의 패인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것이었다. 기초랄 게 아예 없는 내가 바로 주머니 만들기 동영상부터 시작했으니 주춧돌도 없이 허공에 집을 짓겠다는 심보나 다름없었다.
유튜브 검색창에 '코바늘 주머니'가 아닌 '코바늘 기초'를 입력했다. 한참 유튜브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일명 '자코빡(자네 코바늘 한 번 빡세게 배워보겠는가)' 시리즈의 김라희 선생님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