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입과 귀가 된다는 것

등록 2001.08.21 00:17수정 2001.08.2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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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아빠는 육십 평생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땅을 샀어요. 도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땅이랍니다. 아빠는 땅을 사기 위해 숱하게 알아보러 다녔고, 경매에서 떨어질 때는 맘도 아파했지만 좋은 땅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위로하곤 했었죠. 그래서인지 참 이쁜 땅을 샀어요.


아빠는 땅을 제게 많이 보여주고 싶어했답니다. 그래서 저도 종종 따라갔고, 여기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팔을 들어 가리키는 아빠의 손짓과 눈빛, 그리고 나를 데리고 땅을 설명하는 아빠의 발걸음은 눈이 부셨습니다.

자식이 되어 부모의 꿈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찬 일이었지요. 엄마, 아빠가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지는 못했지만, 농장이라 하기에는 아직 부끄러운 그 농토를 함께 일구고, 함께 얘기 나누는 모습이 저에게는 작은 위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빠는 땅을 사고 언제부터인가 고민이 생겨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엄마는 고민하는 아빠의 모습이 병으로 도질까하여 노심초사했습니다. 땅보다 아빠를 잃게 될까 두려워했지요.

방학이라 집에 온 저는 아빠가 땅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생각하지 않은 데다가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오빠가 아빠 때문에 법률구조공단에 문의하고 알아보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갖게 되고 제가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런 거예요.


아빠가 경매로 산 농토에는 그 전에 그 땅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던 사람이 있었어요. 주인이 바뀌었으니 나가달라고 하자 그 사람은 키우던 시금치를 위해 3월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우리 땅이 된 것은 작년 11월이였구요. 그래서 기다려주마하고 기다리다 차일피일 미루며 나가지 않자 아빠는 이사비용까지 주겠다고 하며 나가라고 했지요.

당연히 법적으로 소유물방해제거청구나 구청에 농작물경영촉구서인가를 내면 그 사람은 쫓겨가겠지만 이혼한 아들의 아이를 키우며 사는 모습이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는 인간적인 연민과 동정이 아빠 맘을 약하게 했나봐요.


그 사람이 나가지 않는 바람에 키우려했던 오가피 나무가 철을 놓치게 되자 낭패감도 들었고, 또 갑작스런 농사로 아빠가 병이 날까 두려워한 엄마가 그 사람이 요구하던 3년 임대를 체결해주기로 했어요. 나머지 하우스 2동 자리에만 우리 농작물을 짓기로 하구요.

그런데 그 땅은 임대를 하면 안되는 땅이었지요. 그건 쌍방간에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땅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 구청에 고발을 했습니다. 자신의 농작물이 폭설피해를 당했고, 보상금을 받기 위해 구청에 신청했다가 우리 아빠와의 계약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본심은 다른 데 이유가 있었지요. 나중에 나갈 때 하우스 시설 비용을 과다하게 우리측에 요구하자는 심보가 생겼답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지 않았는데 나가라고 하니까요. 3500만원을 달래요. 실제 가격보다 몇 배를 부르는 거지요.

구청은 저희에게 농사를 짓기로 하고 산 땅을 목적대로 이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저희땅을 처분하라는 명령의 사전 통지를 했습니다. 저희는 기겁하고 놀랐지요. 힘들게 산 땅을 팔아야 한다니요. 거기다 기간 내에 땅을 팔지 못하면 땅값의 20%의 세금을 내야 합니다.

물론 이 사전통지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 의견서를 내면 되지요. 의견서 내용을 읽고 구청이 그 처분을 거둘 수도 있는 거구요. 저는 구청측의 처사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전 경고장 한 장 없이 땅 산 지 6개월도 안되어 처분명령이 내려진다는 것이 황당했어요.

그런데 구청 입장으로는 3년 계약한 것이 3년 동안 자기 농사를 지을 의지가 없는 거라고 생각이 된 겁니다(그 부분은 이해가 갔어요). 그런데 임대법 위반에 관한 벌금은 300만원 이하입니다. 제 생각에는 임대 안되는 땅을 임대했으니 300 이하의 벌금을 때리고 임대를 하지 못하도록 하면 될텐데, 그 사람들은 처분명령부터 내린 거지요. 저희 땅에는 이 벌금이 적용되지 않는다나 뭐라나... 잘 모르겠더라구요. 어쨌든 농업경영을 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들어서요(부분적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저는 그래서 그 때부터 법에 관해 무지하고, 행정기관을 겁내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귀와 입이 되기로 했어요.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서 구청측의 행정처리가 적법한 것인지 알아보고, 그 처분에 관한 우리측의 의견서 내용을 쓰기 위한 조언도 듣고, 그리고 구청직원과 상담을 하고, 법무사와 법원에도 발걸음을 하게 되었지요.

저를 대하는 구청직원의 태도는 아빠를 대하던 때와 너무나 달랐어요. 아빠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며 사정을 설명하고, 농토의 처분명령 이외의 길을 묻는 아빠에게 자세한 설명이나 지침없이 구청직원은 아버지를 겁주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빠는 구청 밖에서 저를 기다렸지요. 그게 저는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빠의 일처리 방법을 보면서 느낀 것도 많아요. 같은 동네의 아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다리를 건너 건너 구청 쪽 사람과 연관되어 부탁말을 해주기를 바라는 식이었습니다. 전 그래선 안된다고, 저희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오늘만 구청을 세 번 갔는데 세 번째는 구청직원들이 저를 알아보는 것 같더군요. 행정소송을 두려워해서인지는 몰라도 저희가 작성해서 낸 농업계획서 좀 복사해 달라고 했더니-사본이 없었거든요- 굉장히 까탈스럽게 굴더군요. 결국 포기했어요(행정열람 어쩌구 하면서 복사를 하기 위한 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끊어와도 자기들이 안된다고 하면 그만이래요).

그리고 담당자와 계장을 만났는데, 담당자는 늘 하던 식의 습관(제 얘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관계법령을 주욱 늘어놓으며 입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였습니다. 제가 묻는 답이 아니라, 묻지도 않는 관계법을 들썩이는 겁니다. 나중에 담당자가 출장을 가고 계장과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제 의견서를 읽고 난 후 얘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 입장 역시 자신들의 처분명령이 합당하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저의 얘기를 들어주고, 제가 묻는 말에 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한 것은 나름대로 저희의 진심을 읽었다는 느낌을 제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속되게 말하면 제 말이 먹힌다는 느낌이었지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국어선생입니다. 글을 쓸 줄 알아요. 그리고 말을 좀 할 줄 알지요. 그리고 상대방을 말을 놓치지 않고 들을 줄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줄 압니다. 그리고 말 할 때 제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희 엄마가 구청직원에게 부탁하는 '잘 좀 봐주세요'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말을 해도 '잘 좀 봐주세요'가 아니라,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시고 살펴 주세요. 혹은 선처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빠는 그런 표현을 할 줄 모르는 자신에 대해 많이 실망하신 눈치예요. 그래서 구청직원과 말이 잘 안되었다고 생각하시죠. 물론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해서는 될 말과 안 될 말을 구별하는 방법 등을 알면 훨씬 낫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구청직원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저희의 본의를 전달하기에는 나은 방법들이겠지만, 세 살짜리 아이에게도 상대성 이론을 가르칠 수 있다는 교육이론을 들이댄다면 구청 쪽에서 조금 쉽게 찬찬히 설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엄마랑 쇼핑을 하러 가면, 엄마는 눈이 나빠 글자를 잘 읽지 못합니다. 과일이 넓게 깔려 있는 과일 무더기 앞에 서면 가격이 위나 구석에 매달려 있고, 과일에 바로 붙어있지 않아 찾기도 힘들어합니다. 그럼 제게 묻지요. 이것이 얼마냐고... 이 때 저는 부모님의 눈이 되어야 해요.

가끔 부모님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혹시 힘들어하는 일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간혹 그 일이 제가 할 수 없는 것 같더라도, 생각해보면 대학물 먹고 성인이 되어 부모님이 하시는 일 못할 게 뭡니까. 그런데 우스운 것이 할머니께서 귀가 어두워, 여러 번 얘기해야 할 때는 훨씬 더 쉬운 일인데도 짜증을 내거든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이중적이고 못된 겁니까.

제가 낸 의견서와 증거자료를 읽고 그들은 아마 나중에 결과를 통보해주겠지요. 그런데 전 법률구조공단에 가서 상담을 하면서 법에 관한 자의적 해석과 그 모호함을 알고 참 우스웠어요.

그들이 제 의견서를 받아주지 않고 같은 처분을 내린다면 전 또 다시 부모님을 대신 해 더 높은 행정기관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몇 번의 다른 절차를 거친 후 최악으로는 행정소송까지 해야겠죠. 물론 이 때는 더 전문적인 변호사를 만나 상담을 구해야 하구요.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그랬어요. 부모 잘못 만난 탓으로 제가 고생한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부모 덕에 법에 관한 것도 좀 알게 되고 인생경험 한다구요. 그러면서 지나다가 본 비행기를 카페로 개조한 곳에서 차 한 잔하며 얘기 좀 하자니까 만원이라 안된데요. 엄마는 차값이 한 잔에 만원이라는건데 전 사람이 많다는 소리인 줄 알고 낮인데 뭐 만원이냐고 서로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킥킥대고 웃었지만... 제가 잘 보는 중국드라마 '황제의 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과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카페같은 곳을 불편해하고, 돈 아깝다고 생각하시는(?) 부모님과 그런데 앉아 차를 후루룩 마셔보는 일이 제게 언제쯤 가능할지... 갈비집은 가도 카페는 가기 힘들거든요. 부모님의 입과 귀가 된다는 것이 속마음도 맞추고 가늠해보는 일일텐데 이런 면에서는 통하는 것이 없나봅니다.

요즘 같으면 사법고시를 준비한다는 초등학교 동창이 많이 생각납니다. 1차에는 여러 번 붙었다는데 최종합격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서로 연락을 안하다가 초등학교 모임에서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 친구를 우정이 아니라, 필요성과 이용가치 때문에라도 다시 연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의 빽을 믿어서가 아니라 몰라서, 어눌해서 저지르는 실수나 삥 돌아가는 힘겨움을 갖고 싶지 않아서요.

저도 모르는 분야를 뛰어들면서 두려움과 불안이 많았던 탓이겠지요. 그런데 거기에 우정이 끼어들지 않으면 인맥이 가능하지 않겠지요? 그 친구가 여전히 시험에 허덕이고 있다면 기운 좀 내라고 밥도 사주고 싶고, 이제는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친구를 보고 싶네요.

덧붙이는 글 | 기사내용에 드러난 법적 용어들은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덧붙이는 글 기사내용에 드러난 법적 용어들은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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