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 손! 내가 붙여준 그 손"
17년째 손 잘린 산재노동자 돌봐

[권은정이 만난 사람] 안산 두손병원 황종익 원장

등록 2002.05.16 09:30수정 2002.05.1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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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두손병원 황종익 원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손은 제2의 언어이자 얼굴입니다/김정훈 기자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지나는 이십대, 그 고비를 지나 일에다가 자신을 맞추느라 허겁지겁하는 삼십대를 넘어서 사십대가 되면, 자신이 하는 일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일까?

경기도 안산시 두손병원 황종익 원장(47)의 첫마디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다.

"이 일요? 아이쿠, 이거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힘들고 어려운 일에 모두가 등을 돌리는 현상은 근로현장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의료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부 인기진료과에만 몰려 정작 응급을 요하는 수술환자들에게는 의료인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현실이다.

황 원장은 성형외과 전문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주로 치료한 대상은 여성들이 아니라 대부분 산재노동자들이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출기에 손이 잘려도 노동자들은 그 잘린 손을 들고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한 때가 있었다. 황 원장은 17년간 그들을 치료하면서 그들과 함께 해온 의사다. 훌륭한 일을 하시는 거라고 하자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저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으니 제가 오히려 감사해야지요."


두손병원은 지은 지 1년여 되었다. 6층 건물 전체가 아늑하고 다정한 분위기다. 손 수술을 마친 환자들이 물리치료를 받는 1층에서 6층 입원실까지 오가는 환자나 직원의 표정이 모두 하나같이 밝다. '본격적인 손 전문병원'으로 자리잡기 위한 황 원장의 각오가 병원 곳곳에 스며 있다.

그는 고대구로병원 성형재건 특수외과에서 시작하여, 광명시 성애병원을 거쳐 안산 두손성형외과에서 현재 두손병원까지 오는 동안 오로지 손가락 접합수술에 전념해왔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손가락이 절단되면 하얗게 됩니다. 피가 없어지니까요. 그러다가 다시 이어지면 빨갛게 되지요. 그 순간이 바로 제가 의사로서 희열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외과의사로서 '이쁘다'고 하는 표현이 맞지요."

손가락 접합시술로 그간 그가 붙여준 손가락 개수만 족히 5천여 개는 넘는다. 그의 열정과 성실한 치료는 전국에 알려져 그의 진료실은 언제나 환자들로 넘쳐났다. 입원실이 없다해도 환자들은 복도에 누워도 좋다며 그에게 치료받기를 원했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그는 사흘 동안 20분 겨우 눈 붙이고 수술한 적도 있었다.

손가락 접합수술은 고도의 난이도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리는 수술이다. 1센티미터의 손가락, 1밀리미터의 핏줄을 잇는 일은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다로운 일이다. 오랫동안 해오면서 질린 순간이 없었을까?


"왜 없겠어요. 있지요. 저도 우왕좌왕한 적이 있습니다."

의사생활 10년째 되던 해, 그도 문득 의문이 들었단다. 일반외과와 흉부외과와 함께 의료계 3D라 할 만한 이 분야를 내가 굳이 고집해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른 동료들이나 후배들은 이미 안정되어 경제적으로도 자리를 잡았는데 자신은 뭔가? 밤에도, 휴일에도, 추석날 차례를 지내다가도 삐삐가 울리면 병원으로 나가는 아빠를 멀뚱히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그는 제일 많이 미안했단다. 그럴 때 뺑소니치듯이 환자들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었을까?

"안식년요? 그런 거 가질 수 없었지요. 시도 때도 없이 환자가 속출하는데요! 그나마 처음엔 저 혼자 하다가 얼마 전부터 부원장과 둘이서 하루 교대로 수술에 들어가는데 제가 자리를 비우면 그 분은요?"

다행히 최근에 제3과장을 구해서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며 그는 적이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처음으로 이루게 된 '드림팀'의 활약은 이번 여름부터 시작된다.

"대개 6ㅡ7월 장마철에 환자가 가장 많거든요. 기계가 있는 곳이 냉방시설이 안 되니 근로자들이 짜증이 나고 힘이 들지요. 자연히 주위가 산만해지고 사고발생률이 높게 되지요."

그가 '한 팀'을 이루게 된 것을 특히 기뻐하는 이유는 그 동안 이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성형외과의사를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기 때문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손가락 접합수술의 수가는 상대적으로 낮다. 쌍꺼풀 수술이 1백만원이면 손가락 하나 붙이는 데는 18만원이다. 거기다가 한 손가락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절반의 수가만 적용되는 웃지 못할 규정이 폐지된 것은 겨우 한 해 전의 일이다.

"정부지원은 그나마 2백% 올려진 게 지금 수준입니다. 손가락 재접합 수술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또 수술의 난이도도 상당히 높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응급수술이어서, 의사개인의 활동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이지요. 그러니 하겠다는 의사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제가 대학병원에서 제자 14명을 키웠는데 남은 사람은 2명에 불과했지요. 하지만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밤새워 수술해서 턱없이 낮은 수가를 받느니 예약 받아서 깨끗하게 시술하고 수입도 훨씬 좋은 미용 성형 쪽으로 가겠다는 것을 '사명감이나 의리로'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의사에 대한 사회의 기대도 그렇고 우리가 이제까지 지녀온 의사상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기대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이런 가운데 개인적인 희생을 바랄 수는 없지요."

어쨌거나 그는 묵묵히 이 길을 걷고 있다. 어깨동무할 동료도 별로 없이 한길을 걸어오면서 그는 나름대로 겪은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같다.

"그 동안 혼자 과천(정부종합청사)에 가서 항의도 많이 했습니다. 짜증스럽고 힘든 일이 없을 수 없지요. 그렇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일이니까요."

현재 수부외과는 전국에 통틀어 10개 정도 있다. 서울에 4개 정도 대구, 부산에 각각 병원이 있다. 전라남·북도는 전문병원이 없는 형편이다. 황 원장은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과 '하고 있는 병원'의 숫자가 일치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큰 병원에서조차 수지접합수술을 기피하는 이유는 병원 경영면으로 보자면 그럴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의료수가가 적은 데 비해 수술인원은 많이 필요로 하고, 주로 밤에 사고가 발생하니 이틀간에 걸쳐 수술인원이 투입되는 거지요. 한 시간짜리 맹장 수술하고, 네 시간짜리 손 수술하고 비교해볼 때 여러 면에서 무조건 해야한다고 우길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 요즘은 서해안 도로가 생겨서 환자들을 '직송'할 수가 있습니다. 전에는 동지나 해상 어선에서 일하던 어부가 어망에 손이 잘린 사고가 있었는데 목포 어업 무선국을 통해 연결되었지요. 절단된 부분을 얼음으로 싸서 운송해왔지요. 냉장 상태로 24시간 안에만 오면 접합이 가능합니다. 그때 그분은 다시는 배를 안 타겠다고 하시더군요. 4년 전에는 헬기 타고 온 분도 있습니다. 지금은 핸드폰이 있어서 아주 용이해졌어요. 환자를 데리고 오면서 지금 어디쯤이다, 하면 우리가 수술준비를 완전히 해둘 수 있으니까요."

그도 맨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사명감하고는 상관없게 시작했단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1980년 초에 현미경수술이 처음 도입되었어요. 그때는 재접합 수술이라는 것이 의료보험 항목에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한 2년 정도 해봐야지 하고 시작했지요. 나이도 젊었고 욕심도 없을 때였지요. 그런데 하다보니 점점 수술에 대한 노하우와 의술적으로 따라잡을 수 지름길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몇 년만 배우고 여느 성형외과 의사들이 걸어가는 길로 가려 했지만 엉뚱하게 발목이 잡혀버렸다.

"구로병원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는데 구로공단에서 오는 산재환자들이 많이 거칠었어요. 말도 막하고 어떨 때는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제일 순진하고 순박해요. 처음엔 막 화를 내다가 어느 정도 되면 제풀에 꺽여지거든요. 그제서야 받아만 주던 제가 막 뭐라 하지요. 치료받은 젊은 환자들 중에는 저한테 맞은 사람도 있어요. 하하하…. 그런데도 결국은 고마워하고 그래요. 의과대학 처음 들어갔을 때 꿈꾸었던 의사 환자와의 관계가 되더라구요."

그 '사랑의 수렁'에 빠져 아직까지 그는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는 환자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손을 보면 기억하는 수가 많다. 병원직원들과 회식을 하러 갔는데 옆자리에서 보내는 것이라면서 고기접시가 들어왔다. 쳐다보니 누군가 아는 체를 하는데 그는 미안하게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 나서야 그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저 손! 내가 붙여주었던 손!"

그는 아직 주례를 보기엔 젊은 나이지만 손을 치료한 환자가 청해오면 망설이지 않고 주례를 선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근로자 분들과의 인연이 이제는 제 삶의 일부분입니다. 제가 이 일을 하게 만드는 제일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병원을 지으면서도 갈등이 많았지요. 종합병원으로 할까 하다가 손 전문병원으로 가자, 결심했지요. 현재 저희 병원은 성형과 정형이 주를 이루고 내과가 백업(back-up)을 해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대로 뿌리내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이 있습니다."

앞으로 그가 걸어갈 방향은 어떤 것인가? 그의 비전은?

"처음으로 이런 병원을 세워서 하는데 이 분야에 스탠다드로 자리잡겠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근대화과정도 길지 못했고 사람들이 기계와 친숙해지는 시간도 짧았습니다. 앞으로도 사고발생은 피할 수 없는 실정인데, 가능하면 빠른 시간 안에 환자들이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지방거점 병원이 생겨났으면 하는 것이지요. 저와 같은 일을 하고 싶어하시는 분들한테 제가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그게 제 바람입니다."

그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치료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이고 있다. 안산지역 반월공단 외국인 근로자들은 황 원장을 만나면 자기나라 말로 마음놓고 '안녕하세요'라고 말한다.

"외국인 근로자가 전체 생산직에 3분의 1정도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환자구성을 봐도 4분의 1이 외국인이지요.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네팔, 몽골,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지요. 특히 중국인, 조선족들이 많지요. 저는 그분들이 우리가 3D라고 젖혀둔 분야에 대신 들어가 다쳤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이 분들이 치료받는 게 힘들었는데 이젠 산재보험이 되어서 불법체류자도 치료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법으로 들어와서 일을 하다가 산재신고를 하면 치료를 끝내고 바로 출국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한 조선족 부인은 불법입국에 든 돈만 해도 1천만원이 되었다. 아들 대학 보내려고 중국에서 빚내어 돈벌러 왔는데 겨우 3개월만에 사고가 난 것이다.

"그분은 수술하면서도 울고 병상에 누워서도 울고, 출국할 때까지 울고 갔어요. 참 딱하지요. 그러니 외국인들 중에는 산재 인정을 기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저는 그분들을 보면 우리 60년대가 생각나요. 독일로 취업 갔던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 우리조상들이 떠올라요. 우리가 여건을 만들어서 좀 잘 대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오랫동안 산재환자들을 대하다 보니 근로현장이나 근로자 생활여건 등 그 변천과정이 자연히 눈에 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들어온 이후 산재예방교육과 시설투자 등은 굉장히 나아졌어요. 처음 구로공단 환자들은 사출기라고 플라스틱 성형기에 많이 다쳐왔는데 이제는 그게 전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갔거든요. 지금은 우리 근로자들은 자동차나 중공업 쪽 일을 하지요. 프레스기나 금형기에 다쳐서 옵니다.

그런데 사실 근로현장에 나가보면 산재방지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 있어요. 옷깃만 스쳐도 기계가 멈추게 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들 대부분에게 그 언어가 별 도움이 안되지요. 조심해!라고 해봐야 그런 말에 대한 반응이 느리고…. 또 젊은이들이 기피한 일자리에 나이 많은 분들이나 부녀자들이 투입되어 기계 사고가 잦아요. 그래서 전체 산재발생 건수는 별로 줄어드는 것 같지 않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근로자들이 책임량 때문에 센서를 꺼두고 일하다가 사고가 나는 거지요."

그에게 '진료를 통해 국제노동 변천사를 읽을 수 있겠다'고 하자 자신은 그저 "손바닥만 보고 사는 거"라고 웃는다. 입원실 복도에는 손에 붕대를 감싼 환자들이 명랑한 표정으로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황 원장의 병원에 있으니 그리 걱정할 게 없는 듯 보이는 게 아닐까?

황 원장은 손은 제2의 얼굴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오감을 대표하여, 창조의 시작이며 문명을 발달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보다 절실한 사실은 손이야말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장애를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손을 잃어버리는 것은 경제적인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까짓 손가락 한두 개 없다고 죽느냐'고 쉽게 말들 하지만 황 원장을 찾는 환자들을 보면 손, 손가락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뭉툭하게 잘린 손 뭉치 만으로도 세상을 잡아보고자 애쓰는 사람, 붙여진 손가락을 구부리며 웃어 보이는 환자들, 황 원장은 그들의 손을 맞잡고 "운동하셔야 해요. 그래야 움직일 수 있어요." 차근차근 일러준다. 환자의 손을 어루만지는 황 원장의 손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살아있다는 의미는 의학적으로 볼 때 순환이거든요. 절단되어 떨어져 있는 것에 생명을 이어준다는 것은 혈액을 돌게 해주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붙여 피가 돌게 할 때 그 순간의 만족감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죠."

영화 에서 ET가 건강을 회복해 손가락에 빨간 불을 켜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영화 나오고 한동안 꼬마환자들하고는 손가락을 대고 인사 많이 했지요. 손을 통한 느낌에는 재미있고 따뜻한 느낌이 있어요."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진료실 안에는 환자들이 가져다준 손에 관한 물건들이 많다. "저것은 아프리카에서 온 환자가 준 것이고 저것은 네팔에서…."

환자들에게 이런 정성을 받게 한 그 터전에는 가족의 묵묵한 사랑과 인내가 자리하고 있음을 그는 항상 기억하고 있다.

"가족들은 이골이 나있어요. 늘 미안하지만 저를 이해하고 격려해주니 무엇보다 고맙지요."

그는 더욱 오랫동안 이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이 나면 달리기를 한다. 아침에도 달리고 점심시간에도 달린다. 의대 초년생 당시의 '초심'을 심장의 박동처럼 느끼며 그는 자신의 '행운'에 날마다 감사 드린다. '근로자들의 손'이 되게 해 준 사실이 그는 더없이 감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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