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와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

6·15 공동선언 2항 부정은 헌법정신의 위배

등록 2002.06.03 10:44수정 2002.06.0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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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늦봄 문익환 목사 8주기를 기념하여 늦봄 통일상 시상과 기념공연이 있었다.

지난 48년 4월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방북하여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던 금년 95세 신창균 선생의 평생에 걸친 통일운동에 대한 헌신을 기리어 제7회 "늦봄 통일상"의 시상과 아울러,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하던 그해 신년 초에 쓴 시 제목과 같은 <평양 가는 기차표를 다오>라는 기념공연이 이어졌는데, 이 자리는 또한 '6·15 남북공동선언' 2주년을 맞이하여 올해에도 민족 공동으로 6·15남북공동선언 정신의 실현을 다짐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여기서 "남북이 하나로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문익환 목사의 정신은 70년대 후반부터 민주와 통일을 함께 보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80년대 후반의 민중의 통일의지에 대한 믿음에서 방북이라는 길을 밟아간 김구 선생의 고행 길을 다시 더듬어간 것으로서, 오늘 분단 반세기에 걸친 남북간의 통일 방도 논의에서 차지하는 귀중한 의의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는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한다.

그런데 작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비롯하여 일각에서 제기하는 "6·15남북공동선언 2항"에 대한 부정이야말로 민족대단결이라는 기본 원칙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억설에 불과하다. 반세기에 걸친 통일 논의의 과정에서 객관화된 통일 윈칙을 허물려고 하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발걸음을 뒤로 돌려놓으려 하는 분열증과 조급증의 발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묻고자 한다.

남쪽의 연합제 통일방안은 지금 김대중 정부를 비롯해서 이전의 정권 때도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의 통일방안은 70년대의 과도적 조치로서의 연방제를 거쳐 80년대의 완성된 형태로서의 연방제가 있는데, 일부에서 단계적 의미의 연방제가 표명된 것이 "북의 김 주석의 1991년 신년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단순하게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시, 문 목사의 요청에 대한 화답으로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남의 문익환(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고문) 목사 공동성명으로 표명됨으로써 통일논의 진전에 돌파구가 열려진 것이다.

즉 통일은 남과 북의 현 제도를 그대로 두는 공존의 원칙-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원칙-에서 "통일의 실현방도로서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공동성명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북이 남의 양심세력에게 처음으로 빗장을 열고, 완전한 형태로서의 연방제에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방식으로서의 연방제를 내비친 것이다.


따라서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남의 연합제와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에 공통성이 있다는 확인에 의거해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했다"는 것은 어느 정권 차원에서의 논의로서 시비를 걸고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남북이 통일방안에 차이가 있는 것을 들어내고 공통점을 구해보자는 것은 외세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무력으로 강요하지 말자는 조국통일 3원칙(7·4남북공동성명)의 정신에도 부합되며, 남북이 서로 불가침을 확인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에도 부합되는 것임은 이미 역사적으로 객관화된 터이다.


그런데도 이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또 다른 진리가 있다고 하면서 이를 부정하려고 덤비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형성에 대한 몰이해로서, 분단 수구세력의 이익이나 옹호하는 분열증 아니면 역사적 합의의 문맥도 파악하지 못하는 조급증이라 할 것이다.

그 근본에서는 내·외 분단세력의 기득권을 위해 냉전상태에서 길들여진 국민의 억압된 심리를 자극하여 조국의 남북을 영원히 적대시하도록 함으로써,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무력으로 집어삼키거나 우월한 힘으로 "흡수통일"하자는 억설을 선동함에 다름 아니다.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만이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의거해 통일을 지향해나가자고 합의한 것이 아니다. 독재자 박정희 때도 "7·4남북공동성명"에서 말로는 그렇게 했고, 노태우 정권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역시 말로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돌아서서는 딴소리를 할망정, 민족의 면전에서는 말로서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이 민족사의 진리임을 뉘라서 부정하랴!

이회창씨는 후보가 되기 전에도 "남북공동선언 2항과 관련해서 남·북 연합이나 연방제의 이름으로 남북의 서로 다른 체제를 강제적으로 연결해서는 안된다(일례로 2000년 10월 30일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지에의 기고)"라고 하면서 기실은 북의 연방제가 남의 연합제와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민족적 합의 과정을 한사코 백지화시키고, 6·15남북공동선언의 발목을 잡아 민족사의 진전을 뒤로 돌려놓고자 했다.

그러나 이회창씨는 적어도 대선 후보로서 민족문제를 말하려고 한다면 역사적 사실과 엄연한 진리조차 부정하고, 분열과 대결을 심화시켜 민족 앞에 극한적인 참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언동을 삼가해야 한다.

그래야 할 이유로서 우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전문이 밝히고 있는 민족대단결의 정신을 살펴보자.

"조국의 ……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해야 한다"

헌법 전문이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민족대단결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 헌법 정신이 확인된다. 7천만 민족 모두를 위한 길은 민족의 대단결밖에 없다는 것은 헌법의 명령이요, 민족사에 아로새겨진 양심의 표현이다.

남·북 사이에 서로간의 차이점을 초월해 민족이 단결하고 (1972년 7·4 공동성명), 서로가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면(1994년 남북합의서), 남북의 통일방안에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2000년 6·15 공동선언)는 것은 민족통일의 이정표에로의 첫걸음을 디딘 것이다. 이 민족대단결의 생명력에 의거하고 나아가 남·북 사이의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무력의 행사에 의하지 않고 논의하기로 한 원칙 말고 의거할 것이 어디에 따로 있겠는가?

장차 있을 민족통일기구에서 남과 북 어느 한쪽이 자기의 통일방안을 상대방에게 관철하기 위해 "6·15 남북공동선언 2항"의 파기를 계속 선동한다면 "7·4남북공동성명"이 밝힌 통일의 3대 원칙, 민족대단결 원칙의 부정이요, 회피이며, 씻을 수 없는 분열증의 발로이다. 이야말로 7천만 민족 앞에 상생의 길이 아닌 상극의 정치의 화를 뿌리자는 것에 다름아니다.

덧붙이는 글 | 박석률 /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4월혁명회 평화와 통일을 사랑하는 사람들

덧붙이는 글 박석률 /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4월혁명회 평화와 통일을 사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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