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와 광주, 쓰라린 아픔의 벽이 패인 두 지역을 시작과 끝으로 이 땅의 뜨거운 20대가 걷는다. 남북으로 찢기고 동서로 갈려진 이 땅의 아픔을 느끼고 그곳에 서린 우리 조상의 숨겨진 아니 숨겨져야 했던 소리를 듣는 '2002 청년국토대장정'이 8월 1일 대구를 시작으로 그 첫 발을 내딛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고민하는 젊은 20대들이 세상 속의 자아, 이 사회에서 고민하고 역동하는 새로운 자아를 찾으려 함께 움직인다. 이 땅이 품은 역사의 소리를 온몸으로 듣고 공동체의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겨운 훈련을 하면서 솔직한 자신을 찾는다.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온 이 땅의 역사를 이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주역, 잘못을 고치는 개혁자, 아픔을 싸매는 치유자로 20대가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 걷는다. 세상에 젊은이들이 던지는 일갈이 시작된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76명이 모이는 곳은 광화문 네거리 우리은행 앞. 준비팀은 이것저것 짐을 챙겨 9시에 모이기로 했다. 준비팀은 며칠동안 - 며칠이라니, 국토대장정을 가기로 결정한 두어 달 전부터 줄곧 - 밤을 낮처럼 밝히며 준비를 해온 터라 다들 아침이 무겁다. 9시 반이 되어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숫자는 군중이라 불리울 정도에 이르고 서로들 가방의 무게를 가늠하랴 빠진 물품은 없는지 서로 확인해주랴 소란스럽기가 그지 없다. 이미 몇 번에 걸친 준비모임이 있었던 터라 처음 만나는 서먹함은 없다. 20대다운 자연스러움을 과시라도 하듯 어느새 형, 누나, 언니, 동생, 스스럼이 없다.
평소 눈을 뜨는 시간을 대폭 앞당겨 푹푹 찌는 더위 속으로 대장정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껴둔 돈을 털어가며 죽도록 고생을 하겠다고 찾아드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까?
배웅(대학생·참가자 중 유일하게 8.8 재보선 투표를 하는 영등포을 유권자)씨는 "계절학기를 들으러 학교에 갔다가 청년국토대장정 포스터를 보고 신청을 했다. 박카스에서 주최하는 국토순례에 3번이나 떨어지고 드디어 국토대장정에 참가하게 되었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데에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기대된다"라며 참가이유를 밝혔다.
참가자 중 10대가 둘이 있다. 고등학생 2학년으로 여기저기서 막내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김지원씨는 "싸나이의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다. 고생을 하는 곳에선 사람들이 서로 돕는다. 고생하며 사람들을 사귀고 싶다"며 소년다운 수줍음을 보였다.
오전 10시, 약속 시간대로 사람들이 다 모였다. 대절한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타자 '고난의 걸음', '고생 속에서 사람들을 찾고 나를 발견하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설레임으로 상기된 표정, 그 술렁임이 버스 안에 차곡차곡 담긴다.
인터뷰가 계속된다. 11개조 중 세번째 조의 조장인 박철균(대학생)씨는 "우리 조가 100% 다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힘들더라도 끝까지 완주를 해야 끝나고 나서 무언가 남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둔 현창수씨. "이번 국토대장정은 상업성이 보이지 않아 참석을 결정했다. 단순히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으로 삼을 것이다."
직장 상사와 싸워가며 가까스로 열흘간의 휴가를 내었다는 김민경(직장인)씨는 "걱정도 많이 된다. 평소 잘 걷지 않고 인내력에는 자신이 없다. 내가 얻고자 하는 그 무엇? 걸으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괜히 왔다 싶을 수도 있고 그 무엇을 찾을 수도 있고…"라고 말했다.
본격적인 휴가철인지라 길이 막히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게임과 부족한 잠을 보충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었다. 출발한 지 여섯 시간이 지난 4시 20분. 이제 다 왔나 싶었더니 구미를 지나 또다시 차가 꼬리를 물고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미 대구에는 직접 오기로 했던 지역 참석자들이 다 모인 상태.
참석자 중에는 특이한 이력의 사람들도 눈에 띈다. 중국동포로 2년 째 한국 생활을 한다는 김선범(중국 청화대학교 학생)씨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인식을 하는지 알아 보고 싶고, 영상자료를 만들어 중국대학생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참석이유를 밝혔다. 이어 그는 "한국 대학생들은 중국 대학생에 비해 개성적이고 활발하다. 앞을 내다보는 긴장감도 있다"고 그동안 지켜본 한국의 20대에 대한 평을 덧붙였다.
오후 6시 10분, 버스는 드디어 대구 화원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준비팀의 집요한 요청으로 얻어낸 초등학교 강당을 국토대장정 참석자의 열기로 가득 채웠다. 출석도 부르고 주최측이 나누어주는 면티셔츠 두 장과 조끼, 밀집모자를 받는다. 대구참여연대 김중철 사무처장의 환영사에 이어 곧바로 운동장에 나가 저녁밥도 짓고 텐트도 세운다. 어둑해진 운동장, 모두가 힘을 합쳐 오늘 하루 지친 몸을 뉘일 집들을 하나둘 올리는 모습은 차라리 장관에 가깝다.
서둘러 민생고를 해결하고 난 후 준비된 프로그램은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의 강연. 예정보다 한참 늦은 9시 20분에 시작한 강연은 끊이지 않는 질문을 애써 자제시켜야 할 만큼 성황리에 끝났다.
"우리 국토에 담긴 기억, 아픔, 기쁨을 알아가는 것이 후세의 의무이고, 앞으로의 삶에 방향을 세우는 것이다. 과거는 정보와 지식과 영감을 준다. 역사는 현실이다. 현재의 권력관계이며 미래를 보여준다"라는 메시지는 국토대장정을 시작하는 이들의 가슴에 강한 여운을 남겼다.
국토대장정에 참석한 이들은 민중들의 항쟁과 학살로 점철된 '피로 물든' 남도의 땅을 걷게 된다. 비극적인 역사를 한땀한땀 밟고 가는 이 걸음은 20대의 가슴에 무엇을 남기게 될까? 암울한 과거와 희망의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 이들은 어떠한 교량을 마련할까?
10시 40분. 취침시간을 40분이나 초과했다. 그래도 할 일은 하자. 조별 깃발 만들기에 들어갔다. 나누어준 천조각에 지도를 그리고 손바닥, 발바닥을 찍으며 작품을 만든다. 11시 20분, 지원팀의 안내로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간다.
덧붙이는 글 | '20대가 바라는 세상'이 주최하는 '2002 청년국토대장정'이 8월 1일 대구를 시작으로 8월 14일 광주까지 13박 14일의 일정으로 열립니다. 자연과 역사와 함께 걷는 청년들의 열정이 담긴 여정을 생생하게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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