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국 온천 생각

침묵의 정원3

등록 2003.05.23 10:22수정 2003.05.2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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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생각에 잠겨 있는 김기림

생각에 잠겨 있는 김기림 ⓒ 방민호

옛날에 김기림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함경도 사내였다. 그는 평론가였고 <바다와 육체>라는 산문집을 낸 산문가이기도 했다. 일본에 가서 두 번씩이나 영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동양의 조선인으로 멀리 바다 건너 서양인의 문화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그였다.

도쿄에서 폐병으로 죽어가던 이상(李箱)은 센다이에서 공부하고 있던 그에게 편지로 자기 고달픈 사연을 하소연하곤 했으니, 그는 형 같은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동래 온천에 가서 쓴 수필이 생각난다. 일제시대 산문들을 새로 가려 뽑으려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바로 그 수필이었다. 그가 동래 온천에서 하룻밤 자는데 밤새 북장구 소리가 들리고 창가 소리가 넘쳐 들어 잠을 이룰 수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의 고향 북국의 온천은 그와 달라서 밤은 적요하고 생각에 잠긴 사람에게 좋다는 것이었다.

김기림은 문장이 좋아서 당대 제일의 산문가라 할 만한 사람이다. 그 시대 산문들을 보면서 나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사람으로는 정지용과 이태준과 이광수밖에 발견치 못했다. 산문은 시와도 다르고 소설과도 달라서 시나 소설을 잘 쓴다고 해서 산문도 잘 쓰는 것이 아니다. 산문은 산문 나름의 형태와 품격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김기림은 몇 줄 안 되는 문장으로 나를 북국의 온천으로 데려갔다. 상상이 많은 나는 일제시대 눈 내리는 북국의 온천에 들른 나를 생각했다. 그곳은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에서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탓인지 인적이 드문 그곳에 어제 내린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나는 여장을 풀고 어둠에 물들어 가는 흰 눈을 바라보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 피로한 몸을 푼다. 풀과 나물로 이루어진 식사에 반주를 곁들이고 일찍 여사(旅舍)에 든다. 방은 크지 않은 창이 하나 달려 있고 바닥은 따뜻하지만 실내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인적 드문 온천 마을에 눈이 내린다. 나는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왔다. 나는 그곳에 두고 온 나를 생각하고 사람들을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한다. 낮은 지상에 눈이 내린다. 지상은 적요하다.


어디서 김기림의 온천 이야기를 보았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김기림 전집>을 다 뒤지고 <조광>을 다 뒤졌는데 이 산문이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착각한 걸까. 내가 본 그 글을 분명 김기림의 것이었는데, 그것은 혹여 꿈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북국의 인사가 쓴 글이었을까. 오늘도 나는 이 글을 찾고 있다.

김기림, 그는 조선의 신문들이 폐간되고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는 가운데 낙향해 버렸다. 일본을 위한 글을 이렇다 하게 남긴 것이 없다. 그러한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사색적이다. 현실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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