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엔들 잊힐 리야, 내 고향 옥천

자연이 그린 산수화, 용암사 운해

등록 2005.09.13 17:11수정 2005.09.1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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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선친 묘에 벌초를 다녀왔다. 선친 묘는 대전의 문중 선산에 있다. 아버지는 내가 네 살적에 돌아가셔서 기억도 나지 않고, 사진을 통해서만 모습을 알고 있을 뿐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두 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시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어릴 적, 나에게 아버지는 힘들 때 가끔 원망이나 하는 대상이었고,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질 이유가 없는 잊혀진 존재였다.


어린 마음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내가 겨우 네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떠나가 버린 아버지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생각이 들어, 나이를 한참 먹을 때까지는 산소도 찾지 않았다.

그러다 내 스스로 자식 둘을 키우면서야 아버지의 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는 말처럼, 자식들을 아끼는 그 지극한 부모의 마음이야 4년이든 40년이든 모두 똑같음을 뒤늦게서야 느끼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을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까닭에 애틋한 정이 없어 가끔 명절에 산소를 찾아도 서먹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여서 자주 찾아지지를 않는다. 해서 올 해도 어머니와 아내의 채근을 받고서야 겨우 산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더구나 진작부터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고, 나 죽으면 화장해 우리 산하에 뿌리라고 할 작정으로 있는 나로서는 정성스럽게 산소를 돌보는 일도 어쩐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를 않는다.

그래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산소를 돌보고 성묘도 할 참이지만, 자식에게는 내가 가고 나면 내 묘도 만들지 말고 윗대의 산소도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게 내버려 두라고 할 작정이다.


이런 불손한 마음을 알아채고 오랜만에 왔다고 나무라시는 아버지의 뜻이 작용했는지 묘 주변 풀을 베다가 벌집을 건드려 팔에 두 방을 쏘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놀라 낫을 내던지고 뒤로 물러나 주저앉았는데, 다행히 벌들이 더 이상 쫓아와 쏘지는 않았다.

마침 수지침을 하는 아내가 독충에 물렸을 때 취하는 처방으로 사혈을 해 독을 뺀 덕분인지 조금 따갑고 약간 부어오르기만 했을 뿐 다른 이상은 없었다. 돈 주고도 맞는 벌침을 두 방이나 맞았는데, 공연히 사혈을 해서 침 효과를 떨어뜨렸다고 농담을 해 가며, 준비해 간 술로 예의를 차리고 산소를 떠났다.


그리고는 같이 간 옥천에 사는 누나의 안내로 전에부터 가보고 싶었던 '추소리'로 향했다. 추소리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옥천에 있는 한 시골 동네이다. 중학교 때 그곳에서 자전거 통학을 하던 순박한 친구도 있었고, 고등학교 때 문학 동아리를 하던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가 보기도 했던 곳이다.

내 기억 속의 추소리는 동네 앞에 고운 모래와 자갈로 된 백사장이 있고, 그 앞으로는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리 깊지 않은 맑은 냇물이 흐르고, 그 맞은편에는 위압적이지 않게 정겨운 낮은 산이 강을 따라 흐르고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그래서 옥천이 낳은 위대한 시인 정지용 님의 시 '향수'를 이동원 님의 노래 가락으로 흥얼대며 고향을 떠올릴 때에도, 나는 내가 산 곳이 아니라 한두 번밖에 가보지 못한 그 아름다운 추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시골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떠올린 마을도 바로 그 추소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가끔씩 고향에 들를 일이 있어도 무엇이 그리 바쁜지 다시 한 번 그 추소리를 찾아가 보고 싶은 내 소망은 이루어지지를 않았다. 그러던 참에 이번에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동반하지 않고 아내와 둘이서만 고향엘 온 김에 누나를 졸라 추소리를 가 보기로 한 것이다.

아직 어두워지지는 않은 저녁이 돼 갈 무렵에 도착한 추소리는 여전히 첩첩산중 속에 묻혀 있는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추소리는 옛날 내가 보았고 꿈에 그려온 모습의 추소리는 아니었다.

대청댐으로 인해 물이 불어난 추소리 앞의 냇물은 옛날처럼 강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고 얕은 냇물이 아니라 깊은 호수와 같이 변했고, 그 곱던 모래와 자갈마당도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동네 맞은편에 남아 있는 낮은 산만이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나에게 그 옛날 추소리의 모습을 아스라이 떠오르게 만들 뿐이었다.

자기도 이전 추소리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하는 누나와 함께 옛 얘기를 하면서 한참 동안 물가에 서서 옛날 추소리를 추억하다가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 곳을 떠나며 도로 위에서 내려다 본 추소리는 이미 내 기억 속의 추소리는 아니지만 여전히 아름다워서 이곳 사람들과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고향이자 추억의 장소가 될 것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a 옛날과 달라졌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추소리 모습

옛날과 달라졌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추소리 모습 ⓒ 이찬훈


옥천의 명물 '올갱이국'으로 저녁을 배불리 먹고 역시 누나의 안내로 대전 야경을 보기 위해 식장산엘 갔다.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그 후 곧 고향을 멀리 떠나 살아왔기 때문에 대전의 야경을 감상할 기회가 없었던 동생을 위한 누나의 배려였다.

자형과 함께 야생화와 곤충 등의 접사 사진만을 주로 찍어 아마추어 사진작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누나는 산소의 풀을 뜯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오랜만에 고향에 온 동생을 위해 식장산 안내를 자임했다.

식장산에서 처음 내려다 본 대전의 야경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온통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 대전의 밤 풍경은 어느 도시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고, 주변에는 야경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젊은 연인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a 식장산에서 내려다 본 대전 야경

식장산에서 내려다 본 대전 야경 ⓒ 이찬훈


누나 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난 다음날 새벽, 이번에는 자형이 나설 차례였다. 전날 밤 늦게 돌아와서는 처남과 술친구 해 주느라 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건만, 자형은 또 새벽같이 일어나 처남을 위해 용암사 안내에 나서야 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벌초를 위해 고향에 올 때부터 내가 꼭 가봐야겠다고 작정한 또 한 곳은 바로 용암사였다. 용암사는 옥천 장령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다. 그리고 그 용암사는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한두 번 봄 소풍을 가기도 하고, 가끔 놀러 가보기도 한 곳이다.

어릴 적 소풍을 갔을 적에는 멀어서 다리가 아프기만 하고 그리 좋은 것도 모른 채 다만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곳 용암사는 전국 사진가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곳으로, 누구나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선망의 장소이다.

용암사는 무엇보다도 환상적인 새벽 운해와 그 운해 속에서 떠오르는 일출 풍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절이 되었다. 보통 사진가들의 말로는 11월경의 용암사 운해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렇지만 절에 계시는 스님 얘기로는 사실 9월 중순 경의 운해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자형의 사진을 포함해서 용암사 운해와 일출의 아름다운 풍경을 찍은 많은 그림을 접해 온 나는 이번에 용암사 운해를 직접 가서 보고 사진에 담아보고 싶었다. 아직 어두운 새벽 자형과 내 아내와 나 세 사람은 용암사로 향했다.

옥천에서 이원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있는 소정리 쪽으로 들어가 용암 낚시터를 지나 계속 올라가니 얼마 되지 않아 절 바로 아래 공터에 이르렀다. 이미 사진가 몇 명이 와 있는 듯 승용차 몇 대가 주차해 있었다.

서둘러 내려서 대웅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마애불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용암사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차분하고 고요해, 맑은 풍경소리의 맛과 같았다.

a 용암사 대웅전 뒤에서 내려다 본 운해

용암사 대웅전 뒤에서 내려다 본 운해 ⓒ 이찬훈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오르는 짧은 돌 길 옆으로는 푸른 대나무가 늘어서 있다. 속세에 묻은 때를 모두 벗겨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만나 보라는 듯, 그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은 맑은 향으로 마음을 정화해 준다.

a 용암사 대웅전 뒤 청량한 대숲 길

용암사 대웅전 뒤 청량한 대숲 길 ⓒ 이찬훈


그리고 그 대숲 길 초입에 깔린 작은 돌에는 멋진 달마도가 한 점 그려져 있다. 작을 뿐 아니라 처음 길을 오를 때에는 어두워 발견하지 못했는데 날이 밝아지고 나서 그 길을 다시 오를 때 눈 밝은 아내가 발견해 가르쳐 주었다.

스님인지 아니면 일반 불자인지 모를 분이 아마도 매직 같은 걸 이용해 쓱쓱 그려놓은 듯한 그 달마도는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고, 성품을 보아 성불하라는' 선법을 전한 달마대사의 형형한 혜안을 그대로 전해주는 듯한 명품이다.

얼어붙었던 땅으로부터 새 생명을 불러내어 다시 살려내는 봄빛처럼 자비로운 부처님의 뜻을 체득하고 있는 눈 밝은 분의 솜씨임을 '춘광(春光)'이라는 글자가 말해준다.

a 마애불 오르는 대숲 길 초입 바닥 돌에 그려진 달마상

마애불 오르는 대숲 길 초입 바닥 돌에 그려진 달마상 ⓒ 이찬훈


그 맑은 대숲 길을 지나면 맑은 마음으로 그렇게 자애롭게 서 계시는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불상이 아직 형식화된 양식에 따르기 이전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다. 은은한 붉은 색이 감도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아직도 붉은 입술이 선명한 아름답고 자비로운 여성 모습의 부처님이시다.

a 자비로운 모습의 용암사 마애불

자비로운 모습의 용암사 마애불 ⓒ 이찬훈


나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정형화되고 고정된 격식에 맞춘 불상보다는 이 부처님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자비로운 부처님의 모습을 창조적으로 형상화한 불상에 훨씬 정감이 간다. 예컨대 경주 불곡 감실 부처님이나 충북 괴산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양의 마애불, 그리고 꼭 이웃집 아줌마 같은 모습의 성주사지 불상 등이 그러하다.

왠지 딱딱하고 고답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느껴지기 쉬운 정형화된 불상에 비해 용암사 부처님은 부드러운 여성적 모습을 통해서 진속불이의 진리와 자비로운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 주는 듯하다.

이 마애 부처님 앞이야말로 환상적인 용암사 운해와 일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비록 이 날은 해가 구름에 가려 보지 못했지만 마애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면 그 밝은 태양 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환히 밝혀 줄 것임이 틀림없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해야 하는 사정으로 자형은 사진 몇 컷을 찍고는 먼저 산을 내려갔다. 뒤에 남은 아내와 나는 마애불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전경을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내려와 뒷산으로 올랐다. 마애불 위쪽에 있는 전망 좋다는 또 다른 포인트를 찾기 위해서였다.

대웅전 옆길을 내려와 올려다보니 커다란 암벽을 깎아 새긴 마애불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a 용암사 마애불 전경

용암사 마애불 전경 ⓒ 이찬훈


대웅전을 마주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산정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보물인 쌍삼층석탑이 나란히 서서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a 용암사 쌍삼층석탑

용암사 쌍삼층석탑 ⓒ 이찬훈


그리고 이 쌍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바라보면 대웅전을 포함한 그리 크지 않은 용암사의 아담한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a 용암사 대웅전과 전경

용암사 대웅전과 전경 ⓒ 이찬훈


아내와 나는 다소 가파른 산길을 올라 전망이 확 트여 보기 좋고 사진 찍기에도 좋은 포인트가 되는 커다란 바위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이미 몇 명의 사진가들이 아름다운 용암사의 운해를 열심히 사진 속에 담고 있었다.

아내는 이내 바위에 편히 앉아 환상적인 용암사의 운해를 그윽히 바라보며 그 즐거움을 만끽하는 관조삼매에 빠졌고,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계속 변화하는 운무의 모습 때문에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고 한 아내의 말처럼, 마치 거대한 강물처럼 산 사이를 용트림 하듯 흐르면서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며 장관을 연출해 준 용암사 운해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a 용암사 뒷산 위에서 내려다 본 운해

용암사 뒷산 위에서 내려다 본 운해 ⓒ 이찬훈


새벽에 도착해 아침 9시가 넘도록 용암사의 운해에 푹 빠져 있던 우리는 산을 내려와 다시 마애부처님께로 가 다시 한 번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 앞에 잠시 앉아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에 용암사를 열어주신 부처님의 공덕에 감사를 드렸다.

벌초를 깨끗이 하고 조상님 모시는 일에는 뜻이 없고, 오직 사진 찍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는 아내의 핀잔을 받았지만, 나는 속으로 고향 근처에 자리 잡고 계셔서 가끔씩이나마 고향을 찾아 이렇게 아름다운 고향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아버지의 음덕에 감사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산소 돌본다는 핑계를 대고서라도 더 자주 고향을 찾아와 꿈엔들 잊힐 리 없는 아름다운 내 고향 옥천과 용암사의 모습을 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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