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우 블랙잭>, 일본 의료계를 고발하다

[이한얼의 만화로 세상읽기] 훌륭한 디테일, 그러나 부족한 리얼리즘

등록 2006.07.23 15:13수정 2006.07.2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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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빼어난 의학만화 <헬로우 블랙잭>의 표지

빼어난 의학만화 <헬로우 블랙잭>의 표지 ⓒ 이한얼

<헬로우 블랙잭>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 한 마디로 이 만화를 정의하자면 정의감에 불타는 사이토라는 한 명문대학 인턴이 좌충우돌 벌이는 일본 의료계 고발기라고 할 수 있겠다. <헬로우 블랙잭>이라는 제목은 데스카 오사무의 의학만화 <블랙잭>에 대한 오마주로 헌정된 제목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블랙잭>이 의학판타지에 가깝다면 <헬로우 블랙잭>은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본격 의학고발 드라마다.

이 만화는 상당한 수작이다. 일본의료계의 현실을 초근접 접사로 찍은 듯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만화의 기본 논조에 진심으로 찬동한다. 일본 의료계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더불어 도저히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일본 의료계의 구조적 모순, 뿌리까지 썩은 의료계 현실에 대한 고발이야 말로 이 만화의 핵심이다.


캐릭터의 리얼리즘은 문제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 만화 작가의 캐릭터 구성능력이다. 훌륭한 디테일과 생생한 상황묘사에도 불구하고 사이토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도무지 감정이입이 안 된다.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일류 의대 출신의 인턴? 우선 이 친구의 대학생활이 상상이 안 간다.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학을 다녔단 말인가? 눈 감고 귀 막고 책만 팠다는 말인가?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의예과 일, 이학년(혹은 인내심을 가지고 본과 1학년까지는 인정해 주자)이라면 말이 된다.

아니 사이토는 뭘 했기에 인턴이 될 때까지 그렇게나 물정을 몰랐다는 말인가? 교수들과 술자리도 안했고 인턴선배들과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의료시스템의 모순은 인턴시스템에서 갑작스럽게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육과정, P.K. 제도, 인턴 배정과정에서부터 드러나게 마련이다.

6년 동안 인턴생활에 대하여 그렇게 무지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정의감 넘치는 사이토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 정의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턴의 실상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알았다면 졸업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니까. 혹은 자신의 정의감을 접고 시스템과 타협했어야 할테니까. 그러면 이 만화의 좌충우돌 열혈인턴 사이토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작자는 이렇게 어색한 설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이토라는 캐릭터는 결국 블랙잭 만큼이나 낡고 고린내나는 80년대의 캐릭터이다. 슈퍼영웅의 능력은 제거되었지만 슈퍼영웅의 생뚱맞은 정의감과 불타오르는 의협심만은 그대로 간직한 인물, 그래서 제목이 헬로 '블랙잭' 인지도 모르겠다.


급조된 캐릭터 사이토

a <헬로우 블랙잭>이 오마주한 데스카 오사무의 <블랙잭> 표지

<헬로우 블랙잭>이 오마주한 데스카 오사무의 <블랙잭> 표지 ⓒ 이한얼

사이토라는 캐릭터는 어찌 보면 일본 의료계를 비판하기 위해 급조된 캐릭터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일본의료계에 대한 세세한 디테일, 자료수집, 모두 훌륭하다. 그러나 사이토는 결국 이러한 디테일을 묘사하기 위한 내레이터에 불과하다는 느낌이다.


허영만의 식객이라는 만화를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철저한 조사, 고증, 뛰어난 그림.... 그러나 캐릭터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

만화라는 장르는 결국 서사물이다. 서사물의 인물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2000년대를 사는 내게 사이토는 설득력 없는 박제된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물론 만일 내가 80년대를 사는 고등학생이었다면 이 책의 매력에 흠뻑 빠졌을 법하다. 젊은 인턴이 정의감에 불탄다는 것은 당위적인 사항임을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수용했을 테니까. 그러나 현실의 의대생과 의사들을 만나면서 이 당위성은 수년 전에 폐기처분 되었다.

사이토의 대책없는 정의감과 감상주의가 내게는 신파로 느껴질 따름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일본인들은 신파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감상적일 때가 많다.

어쩌면 일본인의 이런 감성적인 경향성이 파시즘적인 성향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일본의 정치만화를 다루면서 다시 이야기해보자.

한국만화는 왜 의료계를 다루지 못하는가?

한국의 만화가가 한국 의료계를 비판하는 쿨한 만화를 한번 보고 싶은 것이 내 소망 중 하나다. 아마도 <헬로우 블랙잭>보다는 더한 묘사가 넘쳐날 것이다. 제목은 <하드보일드 의학드라마 화이트 잭>으로 하면 어떨까?

그러나 한국 만화계의 현실에서 의학드라마는 태생적으로 나올 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의학드라마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성실한 자료조사다. 자료수집과 의학전문가의 감수만으로도 보통만화보다 열배는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의학드라마마저 변변치 않은 마당에 열악한 만화시장에서 의학만화가 출현하는 것은 거의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의사가 본업을 접고 만화가의 길에 뛰어들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의학만화의 부재, 이 현실은 한국만화계의 시스템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시스템이 바뀔 때까지, 만화시장이 부활할 때까지 내 소망은 그저 소망으로만 머물러 있을 것 같아 마음 아프다.

인턴은 삼신, 이 말의 뜻을 아시나요?
인턴생활의 고달픔, 그 추억의 옛말

내가 존경하는 의사선배가 있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서 지역 최고의 의대에 들어가서 민주화에 투신했다가 9년만에 졸업한 선배다. 그 선배가 인턴시절에 해준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인턴은 삼신이라는 것이다.

삼신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먼저 잠자는 것에는 귀신, 쨤이 나면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귀신처럼 눈을 붙인다는 뜻이다. 늘 잠이 모자라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눈을 붙이지 않으면 피로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먹는 데에는 걸신, 못 먹는 것이 없고, 못 먹는 장소가 없다. 힘든 병영생활에 비견되는 인턴 생활, 그나마 먹는 것이 낙이라서 그랬단다.

마지막으로 환자 보는데에는 병신. 실전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금만 교과서와 달라도 당황하기 일쑤이고 긴장해서 실수할 때도 많다.

그 시절의 인턴들은 또 지저분하기가 한량 없었다. 여자 후배를 데리고 인턴 숙직실을 방문했는데 세상에나 이 선배, 숙직실의 세면대에 소변을 보고 있었다. 놀라 뒤집어진 우리 앞에서 한다는 말.

우리 병원 남자 인턴들은 다 이래..... 이거 물 틀면 완전 깨끗한 거야.....

별로 부끄러운 기색조차도 없었다. 그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존경심을 품고 있던 여자 후배....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요즘은 좀 달라졌을까? 알고보면 의사들도 불쌍한 직업이다. 돈 많이 번다는 것 빼고. / 이한얼

헬로우 블랙잭 1 - 제1외과 편

슈호 사토 지음,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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