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그리고 병원을 이야기한 만화들

현실성과 감동이 적절히 조합된 감동의 의료 만화 <헬로우 블랙잭> <닥터 코토 진료소>

등록 2005.11.04 11:02수정 2005.11.0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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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정으로 정기적으로 종합병원에 다녀야 하는 나는 잠깐이나마 의사와 간호사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종합병원은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늘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하루에도 수백 명 가까이 되는 환자를 상대해야 하는 그들의 사정상 환자는 개인병원에 비해 다소 비싼 진료비에도 불구하고, 허망할 정도로 짧은 진료시간에 다소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질병이 아닌 한, 웬만하면 동네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일본 만화가 자주 다루는 소재 중 하나는 바로 의사와 간호사, 더 넓게 이야기하면 병원과 의료와 관련된 이야기다. 독특한 소재를 다양하게 그릴 줄 아는 미덕을 가졌으며, 그 소재에 있어서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자랑하는 작가의 폭넓은 지식이 돋보이는 만화가 많다는 것이 일본 만화의 특징이다.


수수께끼의 과거를 안고,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알바 의사' 신분으로 병원의 최일선 전쟁터인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의 이야기를 그린 < ER >이나 의사들의 세속적인 야망을 아주 적나라하게 그린 <외과의>같은 만화는 사실적이고 냉정한 묘사의 묘미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 덕분에 독자들이 의료 만화에서 느끼고 싶어 하는 감동은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재미와 사실성, 그리고 감동이라는 요소까지 겸비한 의료 만화는 생각보다 접하기 어렵다. 이런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겸비한 만화를 꼽자면, 나는 2편의 만화를 생각한다. <헬로우 블랙잭>과 <닥터 코토 진료소>다.

<헬로우 블랙잭>, 새내기 의사 '사이토'의 적나라한 종합병원 체험기

a 사토 슈호의 의료만화 <헬로우 블랙잭>

사토 슈호의 의료만화 <헬로우 블랙잭> ⓒ 서울문화사

<헬로우 블랙잭>은 이제 막 학부를 마치고 인턴 과정을 밟는 새내기 의사 '사이토'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다. 그렇기 때문에 <헬로우 블랙잭>은 '사이토'의 개인적인 이야기보다는 '사이토'가 인턴 과정을 밟으면서 많은 진료분야를 접하게 되는 과정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사이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종합병원'은 서열 체계와 여러 음모가 꿈틀거리는 또 하나의 정치판이다. 소속 대학 출신이 아닌 의사는 암묵적인 소외에 시달리게 되며, 교수가 제시하는 치료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함부로 제시했다가는 마찬가지로 소외 대상의 하나로 낙인찍힌다.


한정된 자리에 비하면 많을 수밖에 없는 의사들의 숫자는 결국 그들의 세계를 정치판으로 변질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헬로우 블랙잭>은 그들만의 정치판에서 판치는 종합병원의 그늘과 의사들의 암투를 비교적 냉정한 시선에서 적나라하게 그려나간다.

'사이토'가 인턴 과정을 밟기 위해 거쳐 가는 여러 방면의 진료 분야는 모두 저마다 문제점과 아픔을 안고 있다. 더 이상 손쓸 수가 없을 정도로 암세포가 널리 퍼진 암 환자의 경우, 그들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의사들은 각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되살리는 의사 본연의 임무에 집중하거나, 구체적인 치료를 포기한 채 책임에서 면하고자 아예 퇴원을 권장하는 등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시한부 인생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판정을 받고, 생명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환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건강한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거기에 너무나도 순진해 보일 정도로 의사 본연의 자세를 지키려 노력하며, 고뇌하는 '사이토'의 진지한 자세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요소다.

<헬로우 블랙잭>의 작가 '사토 슈호'는 이렇듯 때 묻지 않은 주인공 '사이토'를 통해 일본 의료계의 현실을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의료계의 감춰진 현실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해쳐나갈 것을 암묵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작가의 이런 암묵적인 권장은 질병을 바라보는 의사의 시선과 환자의 시선을 적절히 조화시킨 덕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실적인 감동에 의해 더욱 깊게 살아난다. <헬로우 블랙잭>은 현재 9권까지 출간되었다.

낙도 의료에서 의사 본연의 자세와 행복을 발견하는 <닥터 코토 진료소>

a 야마다 타카토시의 의료 만화 <닥터 코토 진료소>

야마다 타카토시의 의료 만화 <닥터 코토 진료소> ⓒ 대원씨아이

지역에 따른 의사 수급의 불균형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세속적인 출세나 부와는 거리가 먼 '낙도 의료'는 의사 수급의 불균형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사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옳아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닥터 코토 진료소>의 무대인 코시키 섬의 주민들은 많은 의사를 두고, 선택의 고민까지 하는 도시 주민들 부럽지 않은 의사를 두고 있어 행복하다. 코시키 섬 진료소의 의사인 '코토'는 그들에게 그만큼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무조건적으로 환자에게 헌신하며, 고뇌 서린 태도를 고집하는 의료 만화의 보통의 주인공과는 달리 '코토'는 적당히 인간적인 매력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간호사 '호시노'도 쉽게 짐작하기 힘든 개인 고민에 시달리고 있지만, '코토'는 늘 밝고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며, 애초에 자신을 불신했던 마을 주민들의 시선을 서서히 바꿔놓는다. 게다가 사람의 몸과 건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의사인데도 컵라면에 집착해 간호사 '호시노'에게 매일같이 잔소리를 듣는 모습은 이색적이다.

사실 보통 독자의 눈으로 보면, '코토'의 진료는 '실제로 가능할지'라는 의심을 줄 수도 있다. 그는 급성 충수염에 걸린 환자를 배에서 수술하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섬마을 의사를 불신하는 마을 주민의 의심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시행해야 했던 수술이지만, 독자의 눈으로 봐도 지나치게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에 사실성에 의심이 드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환자에 대한 애정과 끊임없이 진지한 성찰을 아끼지 않는 '코토'의 순수한 내면은 이런 약간의 단점을 만회하기 충분한 요소다.

<닥터 코토 진료소>는 한편으로 젋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고향을 등져 일할 사람을 찾기 힘든 어촌의 현실도 빼놓지 않고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유지하는 섬마을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도 잔잔한 웃음을 준다. '코토'가 그 재능 덕분에 많은 대학병원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데도 코시키 섬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만큼 적나라한 음모와 야망 그리고 대결이 판치는 종합병원에서 느낄 수 없는 '정'이 이 섬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는 이제 식상할 수밖에 없는 뻔한 사명감이나 정의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닥터 코토 진료소>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닥터 코토 진료소>는 현재 17권까지 출간되었으며, 일본에서는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때로는 한 권의 만화가 열 권의 교과서 부럽지 않다

내가 부모님의 핀잔에도 손에서 만화를 떼지 않는 이유는 신중한 선택으로 고른 만화는 보통의 책과 영화 이상의 감동과 지식을 주기 때문이다. 만화에는 어려운 개념의 복잡한 지식도 이해하기 쉽게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 만화는 아쉬움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 일본 만화는 비단 의료 만화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분야에서 놀라울 정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제작된다. 독자의 수준을 결코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지금보다 더 전문적이고, 세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리는 만화가 이야기 구조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에게 앞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보일 것으로 본다. 허영만의 <식객>과 <타짜>는 그래서 돋보이는 만화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만화를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선택에 따라 한 권의 만화는 열권의 교과서 부럽지 않은 폭넓은 지식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노하우21, 그리고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의 제 개인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노하우21, 그리고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의 제 개인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헬로우 블랙잭 1 - 제1외과 편

슈호 사토 지음,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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