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시절 전차 개통, 동양 최초 맞나?

전차부설 일본 도쿄보다 빠르지만 교토보다는 늦어

등록 2007.03.28 05:24수정 2007.07.0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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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4월 초파일에 우리 나라 최초의 전차개통식이 있었다. 서울에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일본 도쿄보다 4년가까이나 빨랐다. 이 때문에 서울의 전차개통이 동양최초였다고 하는 주장들이 간혹 있는 모양이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1899년 4월 초파일에 우리 나라 최초의 전차개통식이 있었다. 서울에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일본 도쿄보다 4년가까이나 빨랐다. 이 때문에 서울의 전차개통이 동양최초였다고 하는 주장들이 간혹 있는 모양이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1899년 4월 초파일(양력 5월 4일), 돈의문(새문)에서 종로를 거쳐 동대문밖 청량리까지 길게 이어지는 전차선로의 개통식이 있었다. 그 시절에 '전기철도', '전기거', '전거'라고도 표현했던 전차는 분명 놀라운 근대문물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간혹 우리나라의 전차개통이 동양 최초였다는 주장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지난해 가을에 방송된 한국방송 <역사스페셜> 프로그램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다뤄진 적이 있었다. 우선 설명을 위해 해당 부분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HD역사스페셜 63회 '13년의 꿈, 대한제국'(2006.9.22일, 밤 10:00~11:00, KBS 1TV)에 언급된 내용이다.


"(성우 나레이션) ...... 그러나 한성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변화는 전기의 도입이었다. 1899년 5월, 한성에는 아시아 최초로 전차가 개통되는데 당시 전차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내국인은 물론 주한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전차는 큰 화제를 모았다. 동대문에서 종로까지 운행하던 전차는 전차타기를 즐기다 가산을 탕진한다는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승객이 많아지자 노선이 대폭 증설되었다. 주한 이탈리아대사였던 로제티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성에 도착하던 외국인이 가장 놀라워하는 전차였다. 완벽하게 관리되는 전차는 한성의 성 외곽까지 연결되고 있다. 전차로 인해서 한성은 근대적 교통수단을 갖춘 극동최초의 도시라는 영예를 얻었다.' 전차이용률이 높아지면서 발전소도 증설되었다. ...... (이하 생략)"

이어서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도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도심을 수놓은 가로등과 그 앞을 가로지르는 전차가 참 인상적이죠? 19세기말에 발명된 전차는 당시로서는 첨단문명의 상징이었는데요, 서구사회에서도 흔치 않았던 이 전차를 아시아 최초로 도입한 나라가 대한제국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한성의 전차개통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도시였던 일본의 동경보다도 무려 3년이나 앞선 것이었는데요, 이처럼 당시 대한제국의 근대화수준은 세계의 열강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변화가 대한제국 선포 이후 불과 3년 만에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자본이나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 당시로선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대한제국의 근대화가 이렇게 급속도로 진행된 것은 고종황제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이하 생략)"

여기에서는 1899년 5월 4일에 개통식을 가진 서울의 전차선로가 아시아 최초의 전차개통이었다고 거듭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올바른 주장인가? 정말로 그러했다면, 조금은 자랑할만한 일이기도 할 텐데 말이다.

동대문 문루에서 종로 방면을 바라보는 풍경인데, 왼쪽 아래는 전차차고가 있던 동대문발전소 구역이다. 전차를 좀 이른 시기에 도입했다는 것과 자주적 근대화에 대한 의지의 표출 사이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등식이 성립하는 걸까?
동대문 문루에서 종로 방면을 바라보는 풍경인데, 왼쪽 아래는 전차차고가 있던 동대문발전소 구역이다. 전차를 좀 이른 시기에 도입했다는 것과 자주적 근대화에 대한 의지의 표출 사이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등식이 성립하는 걸까?
서울도성의 중심도로인 종로(종각 부근)를 가로지르고 있는 전차선로의 모습이다. 한때는 근대문명의 상징이었으나, 1968년에 이르러 전차는 쾌속질주의 시대에 낙후된 교통수단의 대명사로 치부되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도성의 중심도로인 종로(종각 부근)를 가로지르고 있는 전차선로의 모습이다. 한때는 근대문명의 상징이었으나, 1968년에 이르러 전차는 쾌속질주의 시대에 낙후된 교통수단의 대명사로 치부되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단순히 위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이탈리아의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의 글에서 비롯된 듯하다.

로제티는 1902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03년까지 8개월가량 한국에 머물렀다. 원래는 호주와 중국 등지를 순방 중이었으나 그 무렵 서울 주재 이탈리아 공사 그란체세티 디 말그라 백작이 급작스레 사망하는 바람에 그를 대신하여 서울에 급파되었던 것이 그가 한국에 온 연유였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25살이었다.

그는 귀국하여 이내 한국에 머물 때의 체험과 수집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과 한국인(Corea e Coreani)>이라는 책을 펴냈으니 이때가 '1904년'이었다. 10년전 서울학연구소 번역으로 나온 <꼬레아 꼬레아니>(숲과 나무, 1996)가 바로 이 책의 번역본이다. 여기(369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했다. 서울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전차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그 전차들이 서울 근교의 성곽 밖에 이르기까지 주요 간선도로를 통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전차로 말미암아 서울은 그와 같은 근대적 교통시설을 확보한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다. 이 전차는 몇몇 미국인 자본가들이 주도하여 설치한 것인데… (이하 생략)"

그러니까 서울이 전차가 부설된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표현은 로제티의 것에서 나온 셈이다. 하지만 로제티는 틀렸다.


전차개통식 직후에 전차가 어린아이를 치어죽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격분한 군중들에 의해 이렇게 전차는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바람에 일본 교토전기철도에서 데려온 운전수와 기술자들이 신변보호문제로 일제히 사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써 막 개통한 전차노선은 여러 달 동안 개점휴업상태에 들어갔다.
전차개통식 직후에 전차가 어린아이를 치어죽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격분한 군중들에 의해 이렇게 전차는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바람에 일본 교토전기철도에서 데려온 운전수와 기술자들이 신변보호문제로 일제히 사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써 막 개통한 전차노선은 여러 달 동안 개점휴업상태에 들어갔다.
동양에서 최초로 전차를 부설한 곳은 서울이 결코 아니다. 더구나 일본 도쿄보다 몇 년 빠르게 전차를 놓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동양 최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속단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양에서 노면전차방식의 전기철도부설이 가장 빨랐던 도시는 일본 교토(京都)이다.

일본 땅에 전차라는 존재가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890년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개최된 제3회 내국권업박람회 때 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겨우 400미터 남짓한 거리를 시험주행한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이것을 동양 최초의 전차운행으로 보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서 정식으로 영업용 전차운행이 개시된 때는 1895년 1월 31일이다.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의 개최를 앞두고 교토 시치조(七條)와 후시미(伏見)를 연결하는 6.6킬로미터의 노면전차선로를 부설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최초의 전차개통이었으니, 서울보다는 4년이나 빨랐던 셈이다.

그리고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 전차선로가 운행되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많이 늦은 1903년 8월 22일의 일이었다. 하지만 도쿄에서 전차개통이 늦어진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바로 철도마차의 성행 때문이었다. 도로에 레일을 깔고 거기로 마차를 달리게 했던 철도마차는 여전히 값싸고 빠른 교통수단이었으므로 구태여 서둘러 전기철도로 전환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었다. 요컨대 전차개통시기가 도쿄보다 서울이 몇 해 빨랐다는 사실 자체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근대시기 전차, 전기, 전화 등의 도입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기초자료로 자주 인용되곤 하는 <경성전기주식회사20년연혁사> (1929)의 일부분이다. 여기에는 "동양에서 전차가 운행된 것은 일본 교토가 그 효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적고 있다.
근대시기 전차, 전기, 전화 등의 도입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기초자료로 자주 인용되곤 하는 <경성전기주식회사20년연혁사> (1929)의 일부분이다. 여기에는 "동양에서 전차가 운행된 것은 일본 교토가 그 효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적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전차선로부설의 과정과 그 실상은 어떠했을까?

이에 관해서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발행한 <경성전기주식회사 20년연혁사> (1929)에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이 비록 일본인들에 의한 기록이기는 하지만, 전차도입의 역사에 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이어서, 도리 없이 그 내용을 인용하기로 한다.

"동양에 있어서 전기철도의 남상(濫觴)은 명치 27년(즉 1894년, 정확하게는 1895년이 맞음) 교토(京都)에서 운전된 것이 효시(嚆矢)라 하는데, 당시 콜부란씨는 경성에서 전기철도를 부설하려고 해도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교토전철의 설계자였던 미국공학사 남작 마키 헤이이치로(眞木平一郞)씨에게 위촉했고, 마키씨는 역시 미국공학사인 오하타 코우노스케(大圃孝之助)씨와 이시쿠마 노부노유(石외信乃雄)씨 기타 2명을 동반하여 명치 31년(즉 1898년) 10월 경성에 도착하여 마키 남작은 설계에, 오하타 이시쿠마 양씨 기타는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동월 17일 기공하여 서대문, 홍릉(청량리) 간의 단선궤도부설(單線軌道敷設)과 더불어 가선공사(架線工事)에 착수했고 동년 12월 25일에 준공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동대문 내에 발전소용지를 선정하여 동 12월부터 기초공사를 착수하였으나 때마침 혹한이 있을 때에 공사가 여의치 않았지만 마침내 다량의 목탄을 태워 현동소설(玄冬素雪)의 가운데 공사를 마쳐 75킬로 직류 600볼트 1백마력 기기(汽機) 매킨토시식 보일라 바브코크식 등을 설치하고 전차의 조립 등도 마쳤는데, 이리하여 모든 일이 완료됨에 따라 명치 32년(즉 1899년) 음력 4월 8일의 제일(祭日, 즉 초파일)을 기하여 화려한 개통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료에는 위의 내용에 덧붙여 "운전수는 전부 교토전철(京都電鐵)에서 경험을 가진 일본인들로만 초빙하였고, 개통 직후에 벌어진 이른바 전차소타사건(電車燒打事件)으로 인하여 이들이 5월 중순 일제히 파업 귀국하는 바람에 전차의 운전은 불능상태가 되고 따라서 휴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위의 기록을 훑어보면, 우리나라에 전차선로가 개설될 당시에 이 공사를 위해 동원된 기술자 및 운전수 등이 일본 교토전기철도 출신에서 데려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로써도 고종 시절의 전차개통이 동양 최초였다는 주장은 '아쉽지만' 결국 사실무근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서울거리에 전차선로가 놓인 것을 두고 자주적 근대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표출로 간주하는 것은 혹여 너무 팔이 안으로 굽는 해석이지는 않을까?
#전차 #전거 #아시아 최초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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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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