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관광하는 게 아니라, 오늘을 여행하는

[서평] 다카하시 아유무의 <러브 & 프리>

등록 2007.04.02 15:35수정 2007.04.0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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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사람을 만나도, 책을 읽어도, 사진집을 넘겨봐도, 술을 마셔도 영화를 봐도, 음악을 들어도... (중략) 억울할 정도로 세상은 '대단한 사람', '대단한 작품'으로 넘쳐난다. '엄청난' 감동으로 마음이 떨릴 때 나는 98%의 감동을 느낀 후, 2%의 침을 뱉는다. 나도 절대 질 수 없다. 그 침 속에 내일의 내가 있다." - <2%의 침>

'자기를 찾아 떠나는 젊음의 세계 방랑기'라는 그럴싸한 부제를 달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26살 청년의 내면 기록이요, 사랑하는 그녀에게 바치는 한 권의 연서다. 그 청년은 일본에서 괴짜로 통한다는 다카하시 아유무, 그녀는 그의 부인인 사야카.


장장 1년 8개월에 걸친, 오대양 육대주를 종횡하는 두 사람의 신혼여행의 여정과 그 길 위에서 느끼고 경험한 감정들이 일기같은 형태로 압축돼 있다. 그러니 여타 다른 여행기의 형태로 출판되는 책들과 비교하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이렇다 할 여행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전무하고, 사진이라고 실린 그림들도 죄다 사람들 얼굴이기 때문.

이뿐인가. 전문 작가가 아닌 관계로 글 면면은 거칠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다. 유려하진 않지만 유려하려고 노력하는 글들도 제법 보인다. 조금 아니 제법 멋을 부린 메모정도로 보면 무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얕잡아보면 안 된다. 이상하게 진심이 느껴지는 글들이 많다. 이미 누군가에게 보여질 것을 염두에 두고, 어느 정도의 과장과 윤색을 거치는 우리의 일기장처럼. 글 사진 모두 깊이를 따지긴 뭐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다.

표지의 노란 바탕위에 말간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기 어렵지만, 이 수줍은 눈길이 바라보는 곳은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동공이 분명하다. 아이는 영혼이 허락하는 최대한 낯선 방문자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선사한다. 이 순간, 그의 카메라는 단순한 카메라일 리 없고, 이 아이 역시 그에게 단순한 피사체일 리 없다.

저자가 담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은 거대 유물이나 역사적 현장이 아니다. 과거를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여행하려는 그. 하여 그의 발길은 공항이나 면세점, 관광 안내소보단 사람들 북적이는 터미널이나 낯선 거리의 뒷골목, 선술집, 시장에 묶이기 일쑤다.

흑백으로 인쇄된 거친 사진들은 글의 투박함만큼이나 세상 곳곳, 자신의 삶을 힘겹게 일궈가는 이웃들을 잡아낸다. 아프리카 고아들의 유난히 희고 맑은 눈동자는 유럽 어느 도시의 거리 한복판,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삶의 고단함으로 지친 노인의 눈동자와 같은 비중으로 실린다. 절대 묻거나, 쉽게 평하거나, 섣불리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사진을 싣고 자신의 생각을 끼적일 뿐이다. 자유롭게 재미나게 사는 삶에 대해. 기본적으로 그가 묘사하고 싶은 건 '길 위의 사람'이고, 그가 추구하는 건 '즐거움의 공유'다.


그가 쓴 메모 중 하나인 <2%의 침>에서 보여지듯, 그는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살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26살에 세계일주를 하고, 그 기록으로 일약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상한 그지만, 그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존경하는 존 레논이 자신과 다름없이, 슬럼가 출생도 아니고, 귀족 출신도 아닌 그저 평범한 중산층 소시민의 아들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무한한 안도와 공감을 느낀다. 처음부터 대단한 사람은 없다며 절대 자신도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글을 읽다보면 좀 촌스러울 수 있을지 모르나 '나도 그래!' 싶어진다.

그의 인생 목표는 대단해지는 게 아니라 즐겁게 사는 것인 듯하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 2년여의 세계 일주를 떠났고 그 곳에서 그는 '길 위의 인생'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을 얻었다. 그 즐거움이 발견한 법칙 또한 즐겁다.


장거리 여행에서 발견한 법칙 2 - No Food 버스에서
일본인 : 몰래몰래 먹는다. 이윽고 발각되어 주의 받는다. 안 먹는다.
미국인 : 당당하게 먹는다. 곧 발각되어 주의 받는다. 안 먹는다.
애보리진 : 당당하게 먹는다. 곧 발각되어 주의 받는다. 그래도 계속 먹는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며 그가 체험에서 얻은 소박하지만 유쾌한 진리다. 이런 식이다. 책 곳곳에는 26살 청년의 유머로 무장한 짧은 글들이 적지 않다. 글들은 짧지만, 그 깊이나 울림마저 짧은 건 아니다. 장황하고 길게 서술하지 않은 만큼, 그 행간에서 얻어지는 이야기의 기쁨이 있다. 무엇보다 여백을 채우고도 남는 흑백으로 보여지는 길과 사람, 그리고 자연의 모습은 충분히 그 짧음을 채우고도 남는다.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는 일인데, 저자는 그 비일상의 기록으로, 세상의 일상적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무수히 떠나길 바랐으나, 떠나길 주저하는 분께 이 책이 주는 충격과 감동은 적지 않을 것이다.

다카하시 아유무는 누구?

일본에서 유명한 괴짜 시인이자 록가수이며 사업가란다. 자칭 시인이자 록가수라는데 일본 문단이나 음악계에서 인정을 받는지는 미지수. 분명한 것은 72년 도쿄에서 출생. 명문 대학 입학과 동시에 중퇴,갓 스무살에 사업을 한답시고 온갖 빚을 끌어대 아메리칸 바 Rockwell’s 를 개업했고, 여기서 돈을 좀 번 모양.

제법 장사가 되자 내친김에 자서전을 쓰겠다며 여러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나 모두 거절당하자 sanctuary (신전, 성당, 거룩한 장소)라는 출판사를 설립한다. <매일이 모험> 이라는 자신의 책을 출판하는 등 사업을 확장하다 26살, 돌연 지금의 아내인 사야캬를 만나 결혼한 뒤 2년 여간의 세계일주를 떠난다.

이 책으로 아유무는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현재는 오키나와 섬에서 살며 그곳을 세계 제일의 파라다이스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에 빠져있다.

덧붙이는 글 |   

글 사진 다카하시 아유무  / 동아시아

덧붙이는 글   

글 사진 다카하시 아유무  / 동아시아

Love & Free 러브 앤 프리 - 스무 살, 세상의 길목에서 나와 마주하다

다카하시 아유무 지음, 이동희 옮김,
에이지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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