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이 보이는 강화 바다바다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들녘과 산하가 마주하고 있다.
이시우
반세기 전 강화도는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농어촌이었다. 인구도 13만여 명(현재 6만 7천명)에 이르는 작지 않은 시골이었다. 특히 바다와 갯벌을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더 풍요했다.
"그전 시절은 안 돌아올 거에요. 그때는 아무 데나 가도 고기가 많아서 값은 싸도 할 만했는데…."
바다와 함께 살아온 강신봉(64)씨는 연거푸 되뇐다. 그가 부친의 고깃배에서 바다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반세기가 가까워 온다. 그때는 '꽁당배'(배 뒤에 그물을 달고다니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함박도, 은점도까지 가서 고기잡이를 했단다. 분단이 지속되면서 이제는 멀리 북쪽까지 배를 모는 것도 못하지만, 그때만 해도 곧 통일이 될거라는 이야기를 동네 어르신들이 하곤 했단다. "너희들은 군대 안 간다. 곧 통일된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분단의 벽은 더 단단해져만 간다고 걱정이다.
예전에는 배를 탈 때 일꾼들에게 "선용"(선금)으로 일년치 쌀을 사주고 나가야 할 정도로 뱃일이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지금은 뱃일이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이 되어 그나마의 뱃일도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한다.
예전에는 외포리 포구에만도 고깃배가 50여 척에 이르렀다고 김형식(71)씨는 좋았던 시절을 아득히 떠올린다.
"예전에 강화읍 술집에 교동도 농민들이 볏가마를 쌓아놓고 술을 마시고, 외포리 어부들은 돈뭉치를 들고 가서 술을 먹었지."
고깃배가 만선으로 돌아오면, 돈뭉치를 들고 강화읍 술집에서 청춘의 호기도 부려보았단다. 또 연평도까지 나가 고깃배로 하나 가득 조기를 잡아오곤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강화도 외포리 포구에서 주로 잡아온 조기로 굴비를 만들어 팔았다고. 갯벌도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풍요로웠다고 한다. 그는 아직 강화도에 많은 갯벌이 살아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고 아쉬워한다. 이제는 10여 척밖에 남지 않은 고깃배가 현재 강화도 어촌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조력발전 들어서면 대부분 갯벌 제구실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