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부터 2008년까지 대도시와 중소도시지역의 전체 의료인력(위), 지역별로 의사 한 명이 담당하는 환자의 수(아래).
윤성혜
이런 '지역의료 공동화현상'은 이미 심각한 상황. 하지만 앞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영리병원, 즉 투자개방형의료법인이 도입되면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영리병원 체제에서는 '돈벌이'가 되는 대도시, 대형병원으로의 투자 및 의료인력 쏠림 현상이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환자 '생명'보다 이윤추구가 우선인 영리병원영리병원이란 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데 외부자본을 끌어 쓸 수 있고, 병원 사업으로 낸 이윤을 외부투자자들에게 배분할 수 있는 의료법인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현행 의료법에는 의사 개인이 자영업으로 개업을 하거나,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단체가 병원을 설립운영하거나, 학교법인·사회복지법인 등 비영리법인이 병원을 설립운영하는 세 가지 경우에만 병원 운영이 허용된다.
즉 의사 개인 소유가 아닌 민간병원은 모두 비영리법인인데, 이들 병원은 수익금을 반드시 병원 내에 재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영리병원(투자개방의료법인)의 경우,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서 시설개선 등의 투자를 할 수 있고, 이익이 나면 투자자들에게 배당으로 나눠줄 수 있다. 한마디로 병원이 보다 적극적인 '돈벌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와 한나라당은 의료산업에 외부 자금이 수혈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경쟁 원리를 도입하면 의료부문에 대한 투자가 활성화하고, 기술과 서비스 수준이 높아지며, 의료관광이 촉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의료산업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만들어 경제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9월 '투자개방형의료법인의 경제적 효과' 보고서를 통해 세계 의료관광 규모가 2004년 400억 달러(약 44조 원)에서 2012년 1000억 달러(약 110조 원) 규모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영리병원 도입을 통해 국내 병원들의 경쟁력을 높이면 태국, 싱가포르, 인도처럼 해외 환자를 대거 유치해서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원은 의료서비스가 핵심 산업으로 부상하면 제약업, 의료기기제조업, 위생서비스업 등의 동반성장을 이끌 수 있어 이들 분야에서 약 18만 7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국회에는 영리병원 도입을 위해 '경제자유구역 특별법'과 '제주특별자치법'의 개정안이 제출돼 있다. 경제자유구역 특별법 개정안은 외국 영리의료법인의 개설 절차를 구체화하고 원격의료 등 운영상의 특례조치를 정한 내용이다. 제주특별자치법 개정안은 제주도 내에 의료 특구를 지정하고 내국인 투자개방형의료법인의 개설을 허용하는 내용이다.
정부 내에서는 그동안 기획재정부와 지식경제부 등 경제부처가 영리병원 도입에 찬성하고 보건복지부가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올 9월 지식경제부 출신인 임채민 장관이 보건복지부를 맡게 됨으로써 '걸림돌이 제거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또 과거 직장과 지역 건강보험을 통합하는 작업에 반대했다가 면직당한 이력이 있는 김종대씨가 최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에 임명됐는데, 통합 건강보험체계도 함께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고 있다.
일부 의료전문가들과 시민단체들은 정부여당의 이런 움직임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박형근 제주의대 교수(의료관리학)는 "영리병원이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만큼 환자들이 치러야 할 비용도 높아지게 된다"며 "이는 결국 점진적으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를 압박하고 민간의료보험 확산으로 이어져 심각한 의료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리병원이 도입돼 의료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장 경쟁에 노출되면 병원들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비급여' 검사와 치료를 늘리는 방법 등으로 의료비를 높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 정부가 엄격하게 의료비 지급을 통제하는 건강보험제도하에서는 큰돈을 벌기 어려워 불만을 가진 병원과 민간보험사들이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즉 모든 병의원에 건강보험환자를 받도록 의무화한 제도를 무력화하려 하거나,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돈 많은 사람들은 개별적인 민영의료보험 가입을 통해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지만 대다수 서민과 중산층은 종전 보다 훨씬 높아진 의료비 부담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기 어려운 양극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런 양극화와 서민층의 의료 불안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적의료보험이 없고 민영보험이 보편화된 미국에서 현재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등 의료민영화(영리병원과 민영의료보험 등의 확대)에 반대하는 전문가집단과 시민단체들은 우리 현실에서 시급한 것은 '의료의 시장화'가 아니라 '의료의 공공성 높이기' 즉, 의료복지의 강화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병상수를 기준으로 국공립병원의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인 10% 남짓에 불과하고, 국민의료비에서 차지하는 공공지출의 비중도 55.3%로 OECD평균인 72.5%에 훨씬 못 미친다. 전국민건강보험의 체계는 잘 갖춰졌지만, 건강보험이 책임져주는 의료비 비중, 즉 보장성 수준이 60%에 불과해 중병에 걸리면 파산하는 가정이 속출하는 실정이다.
또 병의원의 시설 및 인력 투자가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지역의료공동화가 심각하다. 따라서 의료개혁의 방향은 이런 문제들은 더 심화시킬 의료민영화가 아니라 의료에 대한 공공의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