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수로 복역했던 신영복 성공회 신학대 교수가 대전교도소에서 만난 경비교도대원 문행주씨의 결혼식 주례를 서고 있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새천년관 7308' - 선생이 강의하던 교실은 늘 이런 식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수업을 들으려는 항동 주민들과 다른 학교, 혹은 본교 학생으로 붐비던 공간은 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가득했다. 넘치는 학생에 의자가 부족해도 우선시 되는 건 '진짜 수강생'만이 아니었다. 선생의 강의실에선 수강생과 청강생, 모든 이들이 동등한 존재였다.
조금 늦게 도착한 수강생들은 청강생들을 대신해 의자를 날랐다. 누구도 불평하는 이 하나 없었다. 이는 선생이 준 무언의 가르침이었고, 선생이 보여준 사람과의 관계가 그런 것이었다. 그곳에 머문 이들이라면 아마도 알 것이다.
그곳에서 처음 '스승과 제자', '사람과 사람'으로 신영복 선생과 마주했다. 첫날, 신영복 선생은 종이를 나누어주며 그곳에 하고 싶은 말이나 고민을 마음껏 적으라고 했다. 나는 당시의 고민을 줄줄이 적어 제출했지만, 그건 나의 재학생활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선생의 수업이었다. 다시 수업을 듣게 된 건, 선생의 대학원 강의를 청강했을 때였다.
당시 선생의 강의 조교는 나의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친구도 보고 선생의 강의도 들을 겸 신영복 선생의 수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청강 두 번째 날, 친구의 요청으로 수업 중 강의 자료를 소리 내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를 오롯이 쳐다보던 선생의 눈을 기억한다. 그 따스한 눈을 마주하자 떨리던 목소리가 가라앉던 순간도 선명하다. 사투리 섞인 말투와 학생들의 눈을 마주치던 신영복 선생의 모습이 내내 머리에도, 마음에도 남는다.
나는 빚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