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 오후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에서 장애인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지역 주민들에게 장애인 학교 설립을 호소하자, 설립 반대 쪽 주민도 무릎을 꿇었다.
신지수
지난 9월 5일 오후 7시 반, 서울시 강서구 탑산초등학교 강당에서 특수학교 건립에 대한 2차 주민토론회가 있었다. 토론회가 열린 곳에서 지근거리, 특수학교 부지로 선정된 옛 공진초 터가 있다.
현재 강서구 장애 아동들의 상당수는 집에서 2~3시간 거리의 타지역 특수학교로 매일 통학한다. 강서구 내 특수학교 수용인원이 적기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 서울시교육청은 2019년 3월까지 특수학교를 짓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특수학교가 들어서기로 한 바로 그 자리에 난데없이 국립한방의료원을 세우겠다는 주민들, 정확히는 주민들에게 막연히 한방의료원의 꿈을 욱여넣는 국회의원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강서구에 장애인이 너무 많다'거나 '장애인은 나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런 '뻔뻔한' 주장은 지난 7월에 열린 1차 토론회에 이어 5일 진행된 토론회에서도 등장했다. 장애인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가까운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바란 죄(!)로 무릎을 꿇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정을 받아도, 모욕을 받아도 좋으니 학교는 포기할 수 없다는 서러운 외침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그 자리의 수많은 반대 측 사람들을 생각하면 새삼 오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울어도 좋지만 이제 무릎은 꿇지 말자. 당당히 우뚝 서서 인상 쓰며 함께 싸워 이기자.
동정 혹은 배제, 그렇게 장애인은 지워진다 한국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격리와 차별은 매우 뿌리 깊다. 기실 거리에도 학교에도 직장에도 장애인들은 이미 격리될 대로 격리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거리가 평범하게, 장애인이 보이는 거리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이 외국에 나가서 장애인이 '너무 많아서' 놀란다고 한다. 그제야 한국에 장애인이 너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그 나라에 유난히 장애인이 많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단다. 기가 차는 얘기다. 상황이 이러하니 장애인을 어떻게 평범하게 대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지만, 격리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격리된 채 방치되거나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회'에 얼굴을 내밀면 그것만으로 불쾌해한다. 심지어 그 불쾌함을 주저하지 않고 표현한다. '왜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냐'는 질문은 정말 답이 없다.
사회가 이 지경까지 온 것에 대하여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사람을 능력으로 서열화하고 등급을 매겨 차등대우를 하고, 또 그런 취급을 받는 것에 우리 사회 모두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일까. 어떤 환경에서 어떤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든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존엄과 권리가 있다는 발상이 우리 생활에 내려앉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 동생은 지적장애와 자폐성 장애를 가진 발달장애인이다. 동생이 13살 무렵 장애인 수용시설에 보내지기 전까지 우리는 시골 마을에 함께 살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너무나 바쁘셨기에 나는 늘 동생과 붙어 지냈다. 내 친구 중에 발달장애인 동생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호의에 기대는 것'이 무엇인지 어릴 때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말로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서 동정심을 사는 것'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돌아오는 적의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평범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른이건 아이건 아무도 없었다. 동정이 아니면 무시, 혹은 배척이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생존본능이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불쌍하게 구는 법을 배웠다. 불행히도(?) 나는 공부를 잘 했기에 또래 친구들에게 동정을 사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거의 비굴해져야 했다. 야, 나는 진짜 불쌍해. 진짜 불쌍하다구. 비참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 기억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