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청1949년 4월 중앙청에서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농지개혁법>이 통과됐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던 이곳을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고 불렀다. 위당 정인보가 캐피탈 홀을 ‘중앙청’(中央廳)으로 번역하면서 널리 쓰였다. 중앙청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무대였다. 1967년 6대 대통령 취임식 무렵 중앙청 사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농지개혁법'이 강진국의 원안대로 통과된 건 아니다. 정부의 최종안(기획처안)과 국회 본회의를 거치면서, 농지국이 마련한 원안은 상당 부분 수정됐다. 그럼에도 강진국은 '농지개혁법'의 정신과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애썼다. '농지개혁법'의 '원안을 수립한 사람'으로서, 그는 자부심과 함께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농지개혁 실무를 추진하던 시절, 강진국은 딸을 잃었다. 1949년 11월 17일 그의 딸이 세상을 떠났다. <조선일보>는 1949년 11월 18일 자 기사로, 농지국장 강진국의 딸이 병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참혹할 참(慘), 근심할 척(慽), 말 그대로 '참혹한 일'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큰 슬픔을 겪었음에도, 농지국장 강진국은 농지개혁 실무를 진두지휘했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주대환은, 조봉암이 주도하고 강진국이 실무를 지휘한 토지 개혁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토지혁명"으로 규정했다. '유상매상 유상분배' 방식으로 추진된 농지개혁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평등한 출발점에 섰다.
농민은 소출의 30%를 5년 동안만 내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다. 소작료가 50%에 육박하던 농민 입장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주에게는 정부가 채권을 지급했다. 이 채권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이 크게 일어나면서 휴지 조각이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농지개혁과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급속히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농지개혁의 이름은 '개혁'이었지만, 그 파장은 '혁명'에 가까웠다. 수천 년 이어온 '소작농'(小作農)이 '자작농'(自作農)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소작제'는 이렇게 철폐되었다. 대한민국 출범 과정에서 농지개혁이 '예방혁명'(preventative revolution)의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계급 철폐와 함께 평등해진 신분, 농지개혁으로 균등해진 경제력은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자유 대한'은 '평등 대한'으로 출발했기에, 제3세계 신생국가보다 강력한 성장엔진을 얻었다. <조봉암 평전>에서 이원규는 농지개혁의 성과와 의미를 이렇게 평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이룩해냈다. 농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줘 혁명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1950년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이 자녀 교육으로 집중됐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실제로 <2003년 세계은행 정책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토지 분배가 평등할수록 장기적인 경제성장률이 높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타이완, 한국, 중국,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유난히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강진국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