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시스템 홈페이지에 나온 '워리어 플랫폼'
한화시스템
전쟁에 투입된 군인들, 고도로 훈련된 전투원을 위해 만들어진 이 장비들을 어린이들에게 입히려는 이유, 어린이 날에 이 군사장비를 체험하게 하려는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어린이들의 손에 무기를 쥐여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욕망을 마주하자니 떠올리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왜 어린이인가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중등학교 이상, 전국의 모든 학교에 교련 과목을 의무화했다. 공교육 기관을 군사훈련 기관으로 활용한 박정희 정권의 전략은 일본이 학도병을 양성했던 방식을 벤치마킹한 것이고, 일본의 학도병 양성은 히틀러의 유겐트 나치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치석의 <전쟁과 학교>에는 1940년 10월 중학교를 방문했던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학교를 통해 군사교육을 하고자 했던 나치 독일, 제국주의 일본,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왜 모두 '어린이'들을 군사훈련의 대상으로 선정하고, 공을 들였을까? 왜 교육기관을 장악하고 군사화했던 것일까? 이는 군대, 학교 등의 국가기관이 적대감을 고취하고 직접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기제를 창출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폭력은 직접적으로 발생한 것만을 이르지 않는다. 동료 시민을 빨갱이로 호명하고 그들에게 발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국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학습의 결과였다. 공적 공간이어야 하는 국가기관들을 통해 강력하게 확산되었던 낙인, 라벨링(labelling)의 결과였던 것이다.
1989년 11월 20일 유엔에서 채택된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8조 2항은 당사국이 "15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가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할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실행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분단 상태의 한반도에서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에 기반한 적대관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은 여전히 요원하고, 한국사회의 어린이들은 알게 모르게 다양한 적대행위에 노출되거나 동원되어 왔다.
31보병사단은 안내문을 통해 "군인 자녀들이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군인 자녀의 친구에게 군에 대한 신뢰도를 증진"하기 위해 부대개방 행사를 추진함을 밝혔다. 군인 자녀의 친구를 초대해 군의 이미지를 개선하겠다는 취지는 군인가족 구성원들을 위한 직장 개방의 차원을 이미 넘어서 있다. 군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대민사업에 어린이날이 이용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대학에서의 교련 과목이 폐지되었다. 교련 과목 폐지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교육을 군사화하려는 국가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 학생 당사자들의 거센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교련 폐지를 이끌어낸 학생들의 저항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어린이날,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적', '공격', '조준', '사격'으로 채우려는 어른들의 욕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총구의 끝에 살아있는 어떤 존재를 상정하고 겨누는 그 행위로부터 어린이들이 무엇을 경험하길 원하는가?
2022년 5월 5일, 31보병사단이 준비한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광주뿐 아니라 전국 곳곳의 군부대들이 '적으로 규정된 사람'을 잘 죽이도록 설계된 시스템 속에 어린이를 위치시키고, 총기로 그 '적'을 겨냥하도록 안내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 모든 과정을 '학습'이라 부를 것이다.
1980년 5월, 군부독재에 맞섰던 광주의 사람들을 폭도라고, 빨갱이라고 호명했던 그 군국주의의 욕망과 2022년 5월, 어린이의 손에 첨단 무기를 쥐여주겠다는 욕망은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가?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에 복종한 군인들의 총구가 어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는지, 그 끔찍한 폭력을 기억한다면,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들에게 모의 총기 사격을 권할 수는 없는 일이다.
2022년 5월, 100번째 어린이날을 맞으며, 분단 상태의 한국 사회가 어린이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묻는다. 분단이 초래한 폭력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성찰할 책임과 의무가 이 사회의 어른들에게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하고 싶다. 내가 좋은 어른이 되는 것과 별개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가를 고려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책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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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대표, 평화와 교육에 관련한 활동을 하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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