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엔터의 원조, 해어화를 아시나요?

'군산의 권번을 찾아서' 포럼 후기

등록 2024.06.09 18:21수정 2024.06.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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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살풀이춤은 빈손으로 그리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군산의 기생으로 경성까지 이름을 떨쳤던 장금도 류의 춤이라고 한다. 서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의 겸임교수가 공연했다. ⓒ 전재복


그림처럼 조용히 서 있던 여인이 살포시 움직였다.

아침 햇살에 깨어난 한 송이 백목련 같은, 이슬 머금고 피어난 희디흰  연꽃 같은, 단아한 한 송이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실바람도 비켜가는 듯, 호흡마저도 멈춰있는 듯, 춤사위를 펼치는 여인의 몸짓은 한순간 적막처럼 느껴졌다.

가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애간장을 끊어내는 듯한 구음에 실려 흐르는 춤. 가는 듯 머무는 듯, 손 끝 하나 들어 올리는 것마저 파르르 떨리는 실잠자리의 날갯짓 같다.

소매 끝동과 옷고름만 남색으로 색을 냈을 뿐 온통 하얀 치마저고리, 떨잠 하나 없이 정갈하게 빗어 쪽진 머리엔 달랑 은비녀 하나뿐이었다. 요란한 치장을 하지 않고도 저토록 아름답고 기품 있는 춤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수건 하나 들고 굽이굽이 서린 한을 풀어내는 살풀이 춤은 두어 번 본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선 수건도 없이 맨손으로 추는 춤이었는데 그것이 '민살풀이춤'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설명을 듣고 나서 알았다.


군산의 권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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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자료 책자의 표지에 실린 옛날 기생의 춤추는 복장사진 ⓒ 전재복

 
지난 8일 근대역사박물관 장미갤러리에서 좀 색다른 주제의 포럼이 열린다는 것을 페북을 통해서 알게 됐다.

1부에선 군산향토사학자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조종안님이 '군산에 존재했던 5개 권번의 성격 및 활동상'을 주제로 발제했다.


2부애선 사단법인 한국춤문화자료원 최해리 이사장이 '군산 권번 춤의 예술적 가치 발굴과 콘텐츠 개발 가능성'을 주제로 각각 두 사람의 토론자와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펼쳤다.

군산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군산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무형 문화유산의 가치에 대해 너무 모르고 무심했던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다.

외지인들까지 나서서 문화도시로 약진하겠다는 우리 지역의 유무형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고, 그 가치를 함께 찾아보자고 달려와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특히 토론회에 참석한 토론자는 물론 객석의 청중들을 둘러보니 대부분 젊은 층이라는 점도 무척 고무적이었다.

조선시대 천민에 속했던 기생은 공사노비제도가 폐지되는 갑오개혁(1894년)에 천민신분에서 해방됐다. 그 이전에도 기생은 양반계급은 아니었지만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는 품격이 있었다.

이들 기생은 엄격한 교육을 통해 길러졌고 평민들은 쉽게 넘볼 수가 없었다.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고도 했는데 이는 글께나 읽은 양반네들과도 소통을 할 수 있을 만큼 학식도 재능도 겸비했다는 칭찬이었을 것이다.

해어화는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못에 가득 핀 하얀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키며 "연꽃이 아무리 아름다운 들 내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조선의 기생에 대한 인식이 일제 식민지 통치를 거치며 급격히 나빠졌다. 일본에는 없었던 주체적인 예능 행위자들인 기생을 일제는 통제하려고 했다. 1908년 9월에 '창기단속령', '기생단속령'등이 발포됐고 기생을 성매매 종사자로 여겨지게 만들었으며, 1918년에는 기생들의 집단적 공연활동을 금지시켰고, 1930년대 후반에는 기생조직 간의 통폐합을 합법화함으로써 기생 개인의 활동범위와 법적지위가 약화됐다.

기생조합은 일본식 이름인 권번으로 바뀌고, 일제는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조직을 강화하고 통제했다.

그러한 일제식민치하에서도 기생은 예술계의 아이콘이자 대중의 스타였다. 화려한 옷차림에 화대를 받고 노래와 춤을 펼쳤으며, 외출 시에는 화사한 양산을 받고 인력거를 이용하는 등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그 시절 군산에는 수많은 조합이 만들어졌었는데, 그중에 5개의 권번(기생조합, 교육기관)이 있었다니, 군산은 일찍이 근대문화예술의 태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남의 쌀을 수탈해 가는 항구도시였기에 경제활동이 활발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놀이문화와 복식문화, 음식문화도 발전했을 것이다.

그런 아픈 역사 뒤편에서 예술의 혼을 불살랐으며 일제의 탄압과 촘촘한 감시망 속에서도 민족의식은 물론 예술관, 직업관이 뚜렷했던 군산 기생들, 그들의 예술 문화의 발자취를 발굴하고 현대에 맞게 계승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 모두 특히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져야 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문화적 책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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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발제자 (조종안) , 토론자(구민정, 김규영) / 2부 발제자 (최해리) , 토론자(장성은, 최은숙) ⓒ 전재복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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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 교사로 봉직하고, 2007년 2월말 초등교감으로 명퇴 *시인,수필가 *2014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군산시평생학습관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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