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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 급변, 대도주에 추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 21] 천도교는 지켜야 한다는 뜻 담겨

등록 2024.06.18 13:49수정 2024.06.18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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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 봉황각 영정 ⓒ 임영근

 
천도교가 체제정비에 한창일 때에 국제정세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종전되면서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일본은 중국에 있어 이권 확대를 노리고 영일동맹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중국 산동성의 독일 이권을 그대로 물려받고 남양제도의 위임통치령을 얻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 혁명으로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소비에트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소비에트정부는 지주의 소유지를 국유화하고 은행·산업의 노동자 관리에 착수했으며 독일과의 단독강화에 의해 평화체제를 갖추었다. 러시아 신정부는 권내의 다민족을 포용한 채로 자결권을 승인하고, 민족자결 원칙을 제시하면서 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의회에서 <14개조 평화원칙>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① 강화조약의 공개와 비밀외교의 폐지 ② 공해(公海)의 자유 ③ 공정한 국제통상의 확립 ④ 군비축소 ⑤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 ⑥ 프로이선으로 부터의 철군과 러시아의 정치변화에 대한 불간섭 ⑦ 벨기에의 주권회복 ⑧ 알자스 로렌의 프랑스 반환 ⑨ 이탈리아 국경의 민족문제 자결 ⑩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의 자결 ⑪ 발칸제국의 민족적 독립보장 ⑫ 터키제국 지배하의 여러 민족의 자치 ⑬ 폴란드의 재건 ⑭ 국제연맹의 창설 등이다. 

각 민족은 그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하며 외부로부터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민족자결주의는 19세기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함께 약소민족의 자주독립사상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제1차대전 결과 독일·터키·오스트리아 제국이 붕괴되고, 그 판도에 있었던 종속민족들의 처리문제가 시급한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윌슨의 '14개조 원칙'은 이같은 상황에서 제기되었다.

손병희와 춘암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여러가지 대책을 준비했다. 천도교 안에서는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와 비밀결사 '천도구국단'이 결성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기미년 3·1혁명의 거족적인 항쟁의 한 줄기는 천도교의 '천도구국단'에서 발원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윌슨의 민족자결 원칙이 발표되면서 천도교 지도자 이종일 등이 손병희를 찾아와 민중봉기의 계획을 설명하고, 1918년 1월에 다른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대한문 앞이나 파고다공원에서 시위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손병희는 이를 만류하였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타종교들과 연합하여 범민족적인 규모로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연일 측근들과 함께 국제정세와 민족문제를 논의하였다. 1918년이 저물어가는 12월 중순부터 이들이 논의하는 시간도 길어져갔다. 날이 감에 따라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조선민족 문제의 새로운 해결에는 뜻이 없고 현상유지에 그치리라는 전망이 뚜렷해졌다. 천도교측은 비록 일제의 대 조선 민족문제의 기본 방침에 변함이 없을지라도 민족자결 원칙의 새로운 물결 앞에서 우리 민족이 그대로 방관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제의 부당한 국권 박탈을 규탄하고 잔인한 무단통치를 고발하여 우리의 주권회복과 독립달성의 의사를 세계여론에 호소하여야 될 시기는 이 때라는 의견에는 서로 일치하였다. 그러나 이 목적을 달성할 방법론에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천도교 지도층은 국권회복의 방안으로 여섯 가지를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내부에서 논의하였다. 

첫째, 무력봉기이다. 한때 천도교 안에 무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를 했지만, 1894년 동학혁명의 좌절로 보아 실행이 어려웠다.

둘째, 대중시위의 수단이다. 자칫 폭력시위로 전개되면 엄청난 국민의 희생자를 내게 됨으로 배제되었다. 

셋째, 외교활동의 전개이다. 국제정세로 보나 헤이그특사 파견의 좌절로 보아 현실성이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넷째, 국민대회의 개최이다. 각도 각계의 대표들을 서울에 소집하여 조선독립대회를 개최하고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한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지만 가장 실현성이 없고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에서 배제되었다.

다섯째, 독립청원서 제출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일제로부터 냉담한 반응만 살 뿐이오 도리어 탄압만 더 강화될 소지가 있었다. 

여섯째, 독립선언문의 발표이다. 개인이나 단체 명의보다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을 가두와 기관요로에 배포하고, 철시단행, 기도회와 강연회 개최, 일본인 배척, 일화 배격의 무언실행 등을 구상하였다.

춘암을 비롯 지도부는 여섯째 방안을 두고 내부에서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검토하였다. 1919년 1월 상순경이다. 손병희는 거사를 앞두고 1919년 2월 28일 천도교 3세 교조의 지위를 <유시문(諭示文)>을 통해 대도주 춘암에게 넘겼다.

손병희는 3·1독립선언을 준비하면서 동학의 3세교주, 그리고 천도교를 창건한 교조로서의 지위를 춘암에게 이양하였다. 춘암 대도주에게 교단운영의 중책을 맡긴 것은 손병희 스스로가 죽음을 각오하고 3·1혁명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며, 자신은 희생되더라도 천도교는 지켜야 한다는 뜻이 담겼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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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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