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파국 치닫는 의료대란, '시민성' 부재가 초래한 비극

등록 2024.06.18 10:41수정 2024.06.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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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대란을 '의사 집단이기주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의대 정원 확대는 윤석열 정권이 유일하게 국민 지지를 받는 정책이다. 환자단체와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한겨레>(6/12, 6/16 사설)도 마찬가지 시각이다. 의사협회의 집단 휴진에 대해 뇌전증 중증 환자를 치료하는 어느 의사는 '명분 없는' 집단 휴진이라 비난했다(한겨레 6/16 인터뷰 기사). 그분은 "10년 후 1509명의 의사가 더 배출된다 해도 전체 의사수 15만 명의 1%에 해당한다"며 "의대 증원 문제가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전공의 이탈로 중증 뇌전증 환자의 수술이 지연되거나 취소돼 사망으로 이어지는 절망적인 의료 현실에 분노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우선시하는 중증 환자단체나 의료인이라면 의대 증원 논란이 촉발된 넉 달 전에 일찌감치 정권을 향해 그 분노를 표출했어야 했다. 총선 앞두고 일방적으로 내지른 윤석열 정권의 2000명 의대 증원 정책에 대해선 침묵하던 일부 의료인들과 환자단체가 의사 '집단 휴진' 결정이 자신의 문제로 다가오자, 이해관계에 따라 분노하는 모습은 현명한 자세는 아니다. 성숙한 시민성(civic attitudes)을 간직한 의료인이나 환자단체라면 윤석열 정권의 일방통행식 '통치' 행태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 총선 전 갑자기 등장한 2000명 의대 증원 정책이 의학교육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점을 문제 제기하고 정치적으로 불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건 아닌지 먼저 비판하고 분노했어야 했다.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의 본질은 성숙한 시민성의 부재다. 멀리는 2000년대 의료인 집단(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간 이해충돌 속에서, 가까이는 넉 달 전, 소통하지 않는 정부와의 대립각 속에서 침묵하거나 방관했던 '시민성 부재'다. 성숙한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는 '높은 시민성'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 공공의 이익을 지향하는 공동체 문제에 적극 참여하고 공감하며 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대 증원 논란으로 촉발된 전공의 집단이탈 현상 앞에서 국가와 선배 의사들은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저 시급 수준의 임금과 만성적인 수면 부족은 의료계 종사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주당 80시간~100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노동 착취, 바로 야만적인 의료 노동 현실을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의대 증원 논란 당시, 의료공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의료인들 간 연대하는 방식으로 투쟁했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의료인들은 직역 간 이해득실에 따라 지리멸렬한 양상을 연출했다. 이는 그 자체로 미성숙한 시민사회 모습이 투영된 장면이다. 지난해 4월 간호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전공의와 달리, 의사 집단은 법안을 비난하며 격렬히 반대했다. 간호사 집단과 의사 집단이 대립했을 때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로 의사 집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전공의 집단이탈로 윤석열 정권은 최근 수술실 간호사의 불법 의료행위를 적극 방조했다. 미래 의료정책은커녕 정책의 일관성도 없는 난맥상을 여실히 드러낸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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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한의사협회 정문에 걸린 펼침막 <언제나 국민의 곁에 있겠습니다> 의대정원 논란은 단순히 의사협회나 의사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직역을 달리해도 간호사-의사-한의사 등 의료인들이 <의료공공성 확대>라는 방향으로 정부 정책을 견인하고 연대하며 협력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 ⓒ 하성환


4개월 전, 의대 증원 논란 당시,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와 간호사 집단이 보인 행태 또한 미성숙한 시민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특히 한의사 집단이 보인 태도는 시민성이 결핍된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그것은 2010년 어느 한의사가 초음파 의료기기로 진료한 행위에 대해 2022년 12월, 대법원에서 1, 2심 판결을 뒤집고 합법 의료행위로 최종 판결한 데서 시작했다. 그 판결 이후 의사 집단은 대법원 판결을 성토했다. 한의사가 초음파 등 현대 의료기기로 진료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부끄러운 장면을 상처로 떠안은 한의사협회가 이번엔 의사협회의 집단행동을 공격하며 즉자적인 반응을 보인 셈이다.

의료행위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의료인들 간 직역 이기주의에 빠져 사회갈등을 지속하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방과 양방 협업을 위한 거버넌스를 구축해 수준 높은 K-의학을 창조해 낼 성숙한 시민성이 결핍된 결과다. 직역에 따른 눈앞의 이해관계에 집착해 상대를 비난하는 1차원적 태도는 성숙한 시민사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의사, 간호사, 한의사 개개인은 도덕적인데 집단의 도덕성이랄까, 사회윤리는 직역 이기주의에 매몰돼 도덕적이지 않다.

총선 앞두고 2000명 의대 증원을 일방적으로 발표했을 때 간호사-의사-한의사 집단은 성숙한 시민사회 직역답게 한목소리로 그 불순한 동기(?)를 비판했어야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총선 앞두고 의료인들은 현재 OECD 평균치(55.1%)의 1/10 수준(5.2%)인 공공병원수를 늘리는 등 '의료공공성 확대'를 한목소리로 앞장서 정치권에 촉구했어야 했다. 보건 의료권 등 사회권을 강화하는 방향이 복지 국가로 나아가는 모습이자 성숙한 시민성을 간직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가오는 의료 파국을 막기 위해 의료계와 정부는 '공공의료인 증원'을 전제로 즉시 대화에 나서야 한다. 정부와 의료계, 그리고 국회는 공공병원과 공공의료인(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한의사, 응급구조사) 양성 계획을 긴 안목으로 함께 추진하고 입법화할 상설 협의 기구를 즉시 구성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윤석열 정권이 의료공공성 확대를 위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시점이다.


사회갈등은 종종 혼란과 고통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존중과 공감, 협력과 연대의 성숙한 시민성을 발휘한다면 사회갈등은 오히려 더 나은 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 의대 증원 논란으로 촉발된 오늘의 현실에서 지역 의료문제와 필수 의료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선 의료공공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체 의사들을 욕보이고 자존감을 짓밟으며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공권력을 행사할 게 아니다. 2022년 미성숙한 여론을 등에 업고 경찰특공대 투입 운운하며 화물연대 파업을 진압하던 폭력적인 방식으로 의사 집단 전체를 범죄시하며 겁박하는 방식으로 짓눌러선 안 된다. 그런 모습은 회복 불능의 의료 파국을 초래해 국민에게 고통만 전가할 뿐이다.
 
#의료공공성확대 #의대정원논란 #의료파국 #의료대란 #시민성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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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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