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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라니, 고3인데 그래도 돼?

설레는 그 이름, 나의 고전읽기 수업

등록 2024.07.02 16:17수정 2024.07.0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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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

2015개정 교육과정이 시작될 때부터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과목이었다. 외국 영화에서 봤을 법한 수업 장면을 상상하기 딱 좋은 이름이 아닌가. 마침 출판된 교과서도 없다. 내가 고른 고전 한 권을 함께 읽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마지막에는 긴 에세이 한 편을 써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수업이었기에 이 과목을 너무나 가르쳐보고 싶었다.

고전 읽기는 3학년 진로선택 과목으로 배치되었다. 일반선택이라는 이름의 과목은 9등급 상대평가가 필수지만 이 과목은 절대 평가 3단계로 나누기만 하면 된다. 정말, 고전읽기라는 과목과 잘 어울리는 평가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 과목을 3학년 때 가르친다는 점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게는 이 과목을 가르칠 기회가 잘 오지 않았고, 이 수업을 맡은 분들은 그냥 EBS수능특강(수능반영 교재) 중 고전문학 파트를 가르치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다. 물론 그분들을 뭐라 할 수는 없다. 3학년 학생들에게 내신과 수능을 분리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늘 아쉬웠다. 내가 혼자 맡아서 과감하게 '고전읽기'다운 수업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이 수업을 맡게 되었다. 물론 이제 곧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 과목은 2년 후에 완전히 사라진다(심지어 우리 학교에서는 교육과정 편성 때문에 내년부터 이 과목이 사라진다). 그래도 올해 나는 꽤 가치 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일단 수능특강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이 얘기만 듣고도 놀라는 교사들이 있었다. 고3인데 그래도 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은 금방 받아들였다. 과목 이름이 '고전읽기' 아니냐고 설득했더니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아이들도 '고전'이라는 것에 흥미와 궁금증 혹은 욕구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지 요즘엔 교육청에서 수행평가 비율을 늘리라는 권유를 많이 하고 있어서 더 설득력이 있었다.

처음부터 책을 읽지는 않았다. '고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일주일 정도 대화한 듯하다. 모둠으로 하는 활동이 많으니 아이들끼리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 책을 읽었다(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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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 ⓒ pixabay

 
첫째로 고른 책은 <오디세이아>였다. 남자 고등학생이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고르다가 고민 끝에 선택한 책이었다. 꽤 두껍지만 정해진 진도가 없으니 서두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속도에 맞게 책을 읽어갔다. 다만 계속 책 읽기만 할 수는 없으니 매시간 조금씩 다른 질문을 주고 답변을 하게 했고 중간중간 다양한 활동을 넣으려고 노력했다. 글쓰기, 대화, 모둠활동, 장면 그리기, 질문 만들기 등등.

하나씩 보면 그다지 새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규 수업 내내 책을 읽고 이런 독후활동 위주의 수업만 하는 건 처음이라 늘 고민의 연속이었다. 심화 주제를 잡기 위해 논문도 여러 편 읽어야 했다. 전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잘 따라와 주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우리 교실을 살펴본 동료는 생각보다 애들이 책을 잘 읽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는 말을 전했다(얼마나 기대를 안 하신 건지 ㅎ).

그러다 문득 내가 이렇게 고민하며 수업을 이어나간 게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전에 이렇게 지속적으로 매시간 고민한 적이 있기는 했나. 물론 매번 새로운 작품, 새로운 글을 가르치기 위해 수업 준비를 해오긴 했지만 그야말로 한 시간을 위한 '준비'였을 뿐 긴 호흡으로 기획하고 단계별로 밟아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독서는 또 어떤가. 신청자들 몇몇과 함께 책을 읽은 적은 있지만 책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포함된 한 학급을 끌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한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고전읽기는 나의 고전, 즉 '수업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읽어내기 위한 시도였다는 걸 깨닫는다. 그게 바로 이 과목이 내년에는 사라져도 섭섭하지 않은 이유이다. 아마 심화국어라는 과목을 맡게 될 것 같은데 아무려면 어떠랴, 나는 내년에도 나만의 '고전읽기' 수업을 할 생각이다.
#고전읽기 #오디세이아 #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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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jey9595 사진은 우리집 양선생, 순이입니다. 저는 순이와 아들 산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40대 국어교사이고, 늘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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