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오름을 오르며 김태희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김태희
- 제주에 언제 오셨고, 왜 오셨는지 궁금해요.
"2013년 10월 초에 왔어요. 제주에 오기 전에 저희 가족은 아프리카에서 살았어요. 예전에 남편이 NGO 단체에서 일했는데, 에티오피아로 발령을 받아서 첫째가 6개월 되던 때에 이주를 했어요. 중간에 2년 정도 한국에서 지낸 기간이 있긴 하지만, 에티오피아와 탄자니아를 포함해서 아프리카에서만 10년 정도를 살았어요.
첫째가 초등학교 5학년, 둘째가 3학년 때, 갑자기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남편이 큰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아이들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어요. 겉모습은 한국인인데 언어는 영어와 한국어가 혼재돼 있었거든요.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잣대로 삼을 만한 중요한 생각이나 가치를 심어주려면 정체성이 필요하고, 직접 한국에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귀국했어요.
처음에는 연고가 있는 서울, 양평, 전주 등을 주거지로 생각했어요. 근데 학교를 가보니 너무 큰 거예요. 아프리카에서는 규모가 작은 국제학교를 다녔거든요. 독립적인 우리만의 방식으로 살 수 있고, 아이들이 문화적 충격을 덜 받는 곳을 생각하다가 제주를 떠올렸어요."
- 제주에서도 동쪽 끝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여러 학교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그 중 가장 친절하게 상담해 준 학교 쪽으로 이사를 결정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학교가 통폐합 위기였더라고요. 저는 아이가 그때 넷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더 환영했던 것 같아요.
그때 마을에 마침 매물로 나온 집이 있어서 계약을 하고 급히 이사를 왔어요. 전기, 수도는 다 끊겨 있었고, 수풀이 우거진 마당에는 똥돼지 화장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어요. 아프리카에 살다 와서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는 아프리카에서도 외딴 곳에서 주로 생활했거든요.
텐트랑 세탁기만 싣고 무작정 이사를 왔어요. 아이들이 많아서 세탁기는 너무 필요했거든요.(웃음) 이사를 막 와서 세탁기를 차에서 내리는데 지역 교회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목사님이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면서, 교회 교육관에서 당분간 지내라 하셨어요. 덕분에 거기서 지내면서 휴직 중이었던 남편이 목사님한테 집 고치는 걸 배워가며 함께 집 수리를 해나갔죠.
겨울에는 교회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이어서 마당에 중고 트레일러를 들여와 거기서 6명이 6개월을 살았어요. 아이들 학교 다녀오면 데크 깔 때 한 명이 구멍 뚫고 한 명은 못을 끼우면서 함께 집을 만들어갔죠. 우리만의 7평짜리 보금자리를 완성하는데 6개월이 걸렸네요. 7평은 대가족이 살기엔 너무 좁아서 4년 전쯤 옆에 새로 집을 지었어요."
- 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쌓아 올려서 살 집을 마련한 거네요. 어린 아이들이 있어 어려움이 정말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제주에 오신 걸 후회하지 않으셨나요?
"아프리카에 있을 때 사람이 너무 그리웠어요. 같이 한국말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남편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깊은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죠. 그래서인지 내 나라에서 모국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어요.
에티오피아에서 자궁외임신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거든요. 배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겠고, 임신테스트기도 없어서 임신인지도 몰랐죠. 복통을 참고 참다가 당시 새로 생긴 종합병원을 찾아갔어요. 가자마자 수술대에 올라갔죠. 몇 분만 늦었어도 쇼크사를 당했을 거라 하더라고요.
수술하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데 에이즈 위험 때문에 수혈을 받지 못했어요. 수술하고는 몸이 떨려서 10초도 서 있지 못했죠. 병원 밥은 입에 맞지 않아서 배고파 울기도 했어요.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 둘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버텼어요. 그런 힘든 상황을 외국에서 겪었던 터라 제주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0년 넘게 학교 봉사하는 이유
- 요즘 한국에서 보기 드문 다자녀 가정이에요. 제주에 오실 때 아이가 넷이었고, 이후 한 명을 더 나으셔서 다섯이 됐죠. 어떤 마음으로 낳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 것 같아요. 남편은 원래 딸 넷을 낳는 게 꿈이었고요.(웃음) 자궁외임신을 겪으면서 몸이 너무 축나서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어요. 잠깐 한국에 2년 와 있을 때,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 한쪽 나팔관이 막혀 있더라고요. 다행히 치료 받고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우리는 자식이 둘 뿐인가 보다 했는데, 그 치료를 받은 뒤 셋째가 생겼어요. 생각지도 못한 자식을 낳아서인지 남편이 셋째를 무척 예뻐했어요. 저도 수술 이후에 생긴 아이들은 전부 선물 같더라고요. 우리에게 다가온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라 생각하며 낳았어요."
- 아이들은 제주 생활에 잘 적응을 했나요?
"첫째는 한국에서 특히 난이도가 높은 수학을 어려워했어요. 당시는 아이 학교가 혁신학교가 되기 전이었는데, 학습적인 도움이 없었어요. 한글을 잘 몰랐던 둘째는 1~2교시 수업을 빼고 한글을 배웠어요. 그러니 교과 과정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죠. 지금도 학교에 한국어가 서툰 아이가 들어오면 똑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받더라고요. 개선되지 않는 게 좀 아쉬워요.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셋째는 급식 적응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아프리카에서 다양한 한국 음식을 해주지 못했거든요. 조가 들어간 밥만 봐도 이걸 어떻게 먹느냐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죠.(웃음) 아이들이 수업은 어려워했지만 학교는 무척 좋아했어요. 남편과 저는 공부로 스트레스 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가 적응하는 기간이라 괜찮다 생각했어요.
그동안 인터뷰한 분들은 대부분 혼자 혹은 둘이 온 분들이더라고요. 저희는 여섯 명이 이주를 한 거라 그만큼 적응이 쉽지 않았어요. 아이 한 명 한 명의 적응을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으니까요. 다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신경 쓸 게 정말 많았어요."
- 그렇게 어렵게 제주에 적응했는데 갑자기 2016년쯤에 엘살바도르로 가셨어요. 어떻게 된 건가요?
"남편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 신청을 했는데 3개월 만에 발령받은 게 엘살바도르였어요. 대가족이 이동하는 게 쉽지 않아 남편 홀로 발령지로 갔는데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남편이 무척 가정적인 사람인데, 거기서 가족이 너무 그리웠나 봐요. 연휴 때 제주에 왔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게 힘들다는 걸 알게 됐죠. 무모하지만 2주 만에 이주를 결정하고 간소한 짐만 챙겨 엘살바도르로 갔어요."
- 그렇게 가셨는데 왜 6개월 만에 제주로 다시 돌아오셨어요?
"중남미는 아프리카랑은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어요. 우선 스페인어로 소통이 힘들었고, 범죄율이 너무 높은 지역이라 늘 긴장하며 살아야 했어요. 아이들과 안전하게 사는 게 우선이다 보니 지원받을 수 있는 집값을 넘어서더라도 안전한 곳을 골랐죠. 아이 학교도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선생님이 계신 곳을 간신히 찾아갔고요.
그러다 예기치 않게 다섯째를 임신하게 됐어요. 좀 힘들더라도 거기서 낳아 길러야지 했는데, 갑자기 지카 바이러스가 유행했어요. 지카 바이러스에 감염된 임산부는 소두증이 있는 아이를 출산한다는 뉴스가 보도됐고요. 철저하게 단속을 했는데도 지카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을지 모르는 모기를 두 번이나 집안에서 발견했죠. 사흘의 고심 끝에 다시 짐을 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