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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쉬지 않고 학교 봉사한 오남매의 엄마

[제주 이민 10년차들을 만나다] 제주 종달초등학교 학부모회장 김태희씨

등록 2024.07.07 19:35수정 2024.07.0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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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주 열풍'이 분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지난 10년 동안 제주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진짜 삶이 궁금해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기자말]
보호자가 학교를 자주 가는 건 민폐라고 생각해왔다. 치맛바람이 횡행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사람의 선입견이라고나 할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웬만하면 학교에 가지 않았다. 우연히 책 읽어주는 활동을 시작한 뒤에야, 학교를 드나드는 보호자들이 봉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보호자는 교육의 3주체 중 하나고, 학교에는 늘 손이 부족하다. 누군가의 봉사 없이 돌아가지 않는 일들이 학교에 존재하는 것.


오남매의 엄마인데도 10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학교 일을 해온 사람이 있다. 자기 자식만 챙기기에도 하루가 짧을 텐데 어디에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를 챙기는 저 마음은 어떻게 생겨 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더해 갔다.

제주 종달초등학교 학부모회장이자 올해로 11년차 제주 이주민인 김태희(51)씨와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았다.

아프리카에서 제주 동쪽 끝으로
 
a  제주 오름을 오르며 김태희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제주 오름을 오르며 김태희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 김태희

 
- 제주에 언제 오셨고, 왜 오셨는지 궁금해요.

"2013년 10월 초에 왔어요. 제주에 오기 전에 저희 가족은 아프리카에서 살았어요. 예전에 남편이 NGO 단체에서 일했는데, 에티오피아로 발령을 받아서 첫째가 6개월 되던 때에 이주를 했어요. 중간에 2년 정도 한국에서 지낸 기간이 있긴 하지만, 에티오피아와 탄자니아를 포함해서 아프리카에서만 10년 정도를 살았어요.

첫째가 초등학교 5학년, 둘째가 3학년 때, 갑자기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남편이 큰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아이들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어요. 겉모습은 한국인인데 언어는 영어와 한국어가 혼재돼 있었거든요.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잣대로 삼을 만한 중요한 생각이나 가치를 심어주려면 정체성이 필요하고, 직접 한국에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귀국했어요.


처음에는 연고가 있는 서울, 양평, 전주 등을 주거지로 생각했어요. 근데 학교를 가보니 너무 큰 거예요. 아프리카에서는 규모가 작은 국제학교를 다녔거든요. 독립적인 우리만의 방식으로 살 수 있고, 아이들이 문화적 충격을 덜 받는 곳을 생각하다가 제주를 떠올렸어요."

- 제주에서도 동쪽 끝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여러 학교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그 중 가장 친절하게 상담해 준 학교 쪽으로 이사를 결정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학교가 통폐합 위기였더라고요. 저는 아이가 그때 넷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더 환영했던 것 같아요.

그때 마을에 마침 매물로 나온 집이 있어서 계약을 하고 급히 이사를 왔어요. 전기, 수도는 다 끊겨 있었고, 수풀이 우거진 마당에는 똥돼지 화장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어요. 아프리카에 살다 와서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는 아프리카에서도 외딴 곳에서 주로 생활했거든요.

텐트랑 세탁기만 싣고 무작정 이사를 왔어요. 아이들이 많아서 세탁기는 너무 필요했거든요.(웃음) 이사를 막 와서 세탁기를 차에서 내리는데 지역 교회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목사님이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면서, 교회 교육관에서 당분간 지내라 하셨어요. 덕분에 거기서 지내면서 휴직 중이었던 남편이 목사님한테 집 고치는 걸 배워가며 함께 집 수리를 해나갔죠.

겨울에는 교회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이어서 마당에 중고 트레일러를 들여와 거기서 6명이 6개월을 살았어요. 아이들 학교 다녀오면 데크 깔 때 한 명이 구멍 뚫고 한 명은 못을 끼우면서 함께 집을 만들어갔죠. 우리만의 7평짜리 보금자리를 완성하는데 6개월이 걸렸네요. 7평은 대가족이 살기엔 너무 좁아서 4년 전쯤 옆에 새로 집을 지었어요."

- 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쌓아 올려서 살 집을 마련한 거네요. 어린 아이들이 있어 어려움이 정말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제주에 오신 걸 후회하지 않으셨나요?

"아프리카에 있을 때 사람이 너무 그리웠어요. 같이 한국말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남편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깊은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죠. 그래서인지 내 나라에서 모국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어요.

에티오피아에서 자궁외임신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거든요. 배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겠고, 임신테스트기도 없어서 임신인지도 몰랐죠. 복통을 참고 참다가 당시 새로 생긴 종합병원을 찾아갔어요. 가자마자 수술대에 올라갔죠. 몇 분만 늦었어도 쇼크사를 당했을 거라 하더라고요.

수술하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데 에이즈 위험 때문에 수혈을 받지 못했어요. 수술하고는 몸이 떨려서 10초도 서 있지 못했죠. 병원 밥은 입에 맞지 않아서 배고파 울기도 했어요.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 둘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버텼어요. 그런 힘든 상황을 외국에서 겪었던 터라 제주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0년 넘게 학교 봉사하는 이유

- 요즘 한국에서 보기 드문 다자녀 가정이에요. 제주에 오실 때 아이가 넷이었고, 이후 한 명을 더 나으셔서 다섯이 됐죠. 어떤 마음으로 낳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 것 같아요. 남편은 원래 딸 넷을 낳는 게 꿈이었고요.(웃음) 자궁외임신을 겪으면서 몸이 너무 축나서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어요. 잠깐 한국에 2년 와 있을 때,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 한쪽 나팔관이 막혀 있더라고요. 다행히 치료 받고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우리는 자식이 둘 뿐인가 보다 했는데, 그 치료를 받은 뒤 셋째가 생겼어요. 생각지도 못한 자식을 낳아서인지 남편이 셋째를 무척 예뻐했어요. 저도 수술 이후에 생긴 아이들은 전부 선물 같더라고요. 우리에게 다가온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라 생각하며 낳았어요."

- 아이들은 제주 생활에 잘 적응을 했나요?

"첫째는 한국에서 특히 난이도가 높은 수학을 어려워했어요. 당시는 아이 학교가 혁신학교가 되기 전이었는데, 학습적인 도움이 없었어요. 한글을 잘 몰랐던 둘째는 1~2교시 수업을 빼고 한글을 배웠어요. 그러니 교과 과정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죠. 지금도 학교에 한국어가 서툰 아이가 들어오면 똑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받더라고요. 개선되지 않는 게 좀 아쉬워요.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셋째는 급식 적응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아프리카에서 다양한 한국 음식을 해주지 못했거든요. 조가 들어간 밥만 봐도 이걸 어떻게 먹느냐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죠.(웃음) 아이들이 수업은 어려워했지만 학교는 무척 좋아했어요. 남편과 저는 공부로 스트레스 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가 적응하는 기간이라 괜찮다 생각했어요.

그동안 인터뷰한 분들은 대부분 혼자 혹은 둘이 온 분들이더라고요. 저희는 여섯 명이 이주를 한 거라 그만큼 적응이 쉽지 않았어요. 아이 한 명 한 명의 적응을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으니까요. 다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신경 쓸 게 정말 많았어요."

- 그렇게 어렵게 제주에 적응했는데 갑자기 2016년쯤에 엘살바도르로 가셨어요. 어떻게 된 건가요?

"남편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 신청을 했는데 3개월 만에 발령받은 게 엘살바도르였어요. 대가족이 이동하는 게 쉽지 않아 남편 홀로 발령지로 갔는데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남편이 무척 가정적인 사람인데, 거기서 가족이 너무 그리웠나 봐요. 연휴 때 제주에 왔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게 힘들다는 걸 알게 됐죠. 무모하지만 2주 만에 이주를 결정하고 간소한 짐만 챙겨 엘살바도르로 갔어요."

- 그렇게 가셨는데 왜 6개월 만에 제주로 다시 돌아오셨어요?

"중남미는 아프리카랑은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어요. 우선 스페인어로 소통이 힘들었고, 범죄율이 너무 높은 지역이라 늘 긴장하며 살아야 했어요. 아이들과 안전하게 사는 게 우선이다 보니 지원받을 수 있는 집값을 넘어서더라도 안전한 곳을 골랐죠. 아이 학교도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선생님이 계신 곳을 간신히 찾아갔고요.

그러다 예기치 않게 다섯째를 임신하게 됐어요. 좀 힘들더라도 거기서 낳아 길러야지 했는데, 갑자기 지카 바이러스가 유행했어요. 지카 바이러스에 감염된 임산부는 소두증이 있는 아이를 출산한다는 뉴스가 보도됐고요. 철저하게 단속을 했는데도 지카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을지 모르는 모기를 두 번이나 집안에서 발견했죠. 사흘의 고심 끝에 다시 짐을 쌌어요."
 
a  다섯째가 태어난 후 찍은 김태희 씨네 가족사진

다섯째가 태어난 후 찍은 김태희 씨네 가족사진 ⓒ 김태희

 
- 인생의 중요한 결정마다 아이들이 존재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주에서 다섯째를 낳은 뒤에 학교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셨다고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이주 초기 마을 행사에서 알게 된, 평생 인연이 될 만한 두 언니가 있어요. 그분들이 학교에서 책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에 저도 참여하게 됐죠. 엘살바도르 가기 전이었어요. 당시 학교가 통폐합 위기였어요. 시골학교는 퇴임을 앞둔 교장이 부임해 와서 쉬다 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보호자들이 하게 됐고, 당시 마을 이장님도 학교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죠.

우여곡절 끝에 혁신학교로 지정됐고, 1기 공모교장도 뽑았어요. 공모교장 선생님은 보호자들이 학교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지지를 많이 해주셨어요. 다섯째 낳고 남편이 마침 육아휴직을 내서 저도 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책 읽어주는 모임에서 보호자 책 동아리로 업그레이드도 되고, 책축제도 매년 함께 치렀죠."

- 전국적으로 혁신학교가 많이 줄어드는 추세잖아요. '성적 부진 학교'라는 프레임도 있고요. 혁신학교를 지속하는 것에 만족하시나요?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지만, 저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학생 수도 늘어나서 통폐합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공교육 안의 대안학교 같은 학교가 됐으니까요. 너무 성적, 숫자의 측면에서만 학교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아이들 성적이 부진하지도 않지만, 학교가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거든요. 이 학교를 거쳐 간 아이들의 회복탄력성이라든가, 온전한 한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장과 성숙의 측면에서 볼 때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 다자녀를 키우면서 학교 일까지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올해는 학부모회장으로 추대되시기도 했어요. 10년 넘게 활동을 지속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우선 제가 너무 좋아서 하고 있어요. 재미가 없으면 저는 에너지가 생기지 않거든요. 10년 동안 의견이 맞지 않거나 소통이 잘 되지 않아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성장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어요. 봉사는 스스로가 즐겁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둘째는 아이들이 참 좋아요. 내 아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성장하는 걸 보는 게 정말 큰 기쁨이에요.

제 꿈은 좋은 어른이 되는 거예요. 제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성장하도록 도왔을 때 그걸 본 아이들도 사랑과 존중을 자연스럽게 배워갈 거라 믿어요. 그 아이들이 성장해 공동체에 속하면 하나의 촛대와 같은 역할을 하리라 생각해요. 그게 제가 이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a  제주 바닷가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찍은 김태희 씨네 가족사진.

제주 바닷가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찍은 김태희 씨네 가족사진. ⓒ 김태희

 
- 이런 마음과 꿈은 언제부터 품게 되셨나요?

"저는 솔직히 뼛속까지 이기적인 사람이거든요. 제 뇌는 제 입장만 생각하지 남을 고려하는 구조는 아닌 것 같아요.(웃음) 그런 제가 이런 꿈을 품게 된 건 부모님 덕분인 것 같아요. 워낙 자식을 많이 사랑해 주시고, 남에게도 잘 베푸는 분들이셨어요. 저희 외가가 다복해서 십 남매가 넘는데, 조카들 중에 저희 집을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거든요. 그런 부모님을 만나서 이런 꿈을 품은 어른이 된 것 같아요."

- 이주민들을 인터뷰해 보니 이분들이 지금은 제주에 있지만, 어디로든 또 떠날 수 있는 겁 없는 분들이더라고요. 아마 비슷하실 것 같은데, 미래를 모르는데도 지금 여기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제 신조가 '오늘 하루도 무사히'인데,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공간의 개념을 떠나서 저는 제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저의 가치나 생각들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그림책에 나오는 할아버지 마음과 같아요.

어느 마을에 살았어도 저는 제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했을 거예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쌓여서 역사가 된다고 생각해요. 지구의 역사에서 저는 한 점에 불과하겠지만, 이렇게라도 사명을 다하고 싶어요.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뀌면 공동체와 세상도 바뀐다고 믿어요."

- 지난 십 년 동안 개인적으로 어떤 부분이 가장 많이 변했나요?

"저는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당장 일을 벌이는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어떤 때는 혼자 막 달려가서 해치우는데, 그러면 누군가는 그런 제가 부담될 수 있잖아요. 속도를 맞춰서 함께 하려면, 기다리고 경청하고 손잡아야 하더라고요. 아프리카에서는 어떻게든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면, 제주에서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그런 걸 배우고 실천해 온 저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어요. 저는 겁과 불안이 많아서 갈등이 생기면 무척 힘겨워 해요. 그때마다 옆에서 남편이 새로운 관점을 이야기해 주고,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려줬어요. 덕분에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아요."

- 남편과 아이들은 학교 일에 헌신하는 아내 그리고 엄마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 질문을 가족 단톡방에 올려서 미리 답을 받았어요.(웃음) 남편은 한여름 밤 꿈 같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제주에서 살게 돼서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말해요. 제가 즐길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하고요.

첫째는 동생들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학교 일 하면서 스트레스도 받지만 그만큼 즐기면서 하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하네요. 둘째는 엄마가 자랑스럽대요. 학교를 향한 마음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진심이 보기 좋다고요. 너무 힘들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런 가족이 있어서 제가 참 행운인 것 같아요."

-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십 년 전으로 간다면 다시 제주로 오실 건가요?

"다시 올 것 같아요. 서울이 고향인데 이제 너무 낯설게 느껴져요. 익숙했던 지하철만 타도 방향 감각을 잃는 느낌이에요. 제주에서 먹고사는 건 여전히 어려워요. 저희처럼 대가족이 이주를 해오면 더욱 그렇죠. 이주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이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생계가 안정되지 않으면 봉사도 하기 어렵거든요. 저야 이 일을 워낙 좋아하고 남편이 제가 활동할 수 있게 해줘서 가능했지만요."

'너만 잘 살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아이가 극우 성향의 어른이 되었다는 한 지인의 말을 듣고 한동안 마음이 심란했다. '육아의 정답은 무엇일까' 고민을 이어왔는데,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보호자가 나눔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함께 하는 법을 배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했던가.

요즘 태희씨는 남편과 주말부부로 살아간다. 육지에서 일하는 남편은 주말마다 제주를 오가는 수고를 기꺼이 하며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대륙을 건너는 긴 이동을 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사랑만은 변치 않는 이 가족의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정말 용감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용감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제주도 #제주이민 #이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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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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