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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사령부에 두차례 구금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19] 을사늑약을 강제하고자 치밀하게 준비해

등록 2024.07.25 15:01수정 2024.07.2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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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 권우성

 
국망지추에 면암처럼 끈질기고 집요하게 국정쇄신의 방책을 제시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군주는 그때마다 여러가지 관직을 제수하면서 관내로 들어오게 했으나 그는 감투를 닭벼슬이나 개뿔 정도로 하찮게 여겼다.

그의 상소문이나 시무책은 난국을 광정하거나 향후 닥칠 국가적 재앙을 예방하려는 방략이 담겼다. 일본의 차관도입에 관한 비판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병탄 과정에서 가장 먼저 조선의 재정을 장악하였다. 일본인 재정고문에 가다 타에타로가 차관을 떠맡기다시피 제공하고 있었다. 총차관액은 1300만 원으로 조선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액수였다. 일제는 차관 공세를 통해 대한제국의 재정을 자국에 완전히 예속시켰다. 

서상돈·김광제 등이 대구에서 제창한 국채보상운동이 곧 전국으로 확산되고 각지에서 금주·금연운동이 일어나고 여성들이 폐물을 헌납하며 전국민의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그러자 일제는 이 운동을 주도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성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 그리고 일제는 1908년 2천만 원의 차관을 반강제로 더 공급했다. 

면암은 일제의 차관이 갖는 침략의 속성을 간파하고서 상소를 통해 이를 막고자 했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우매한 지도자는 결국 나라를 망치고 자신도 망한다는 사례이다. 

운명의 해, 1905년이 되었다. 고종은 이 해 2월 17일 면암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격인지, 왕권을 되찾아 준 은혜의 보답인지, 냉대와 겁박에도 굴하지 않고 거듭거듭 상소를 올리는 올곧은 선비에 대한 대접인지, '입틀막'인지, 받지 않는 감투를 계속해서 내려보내었다.

면암은 경기도관찰사를 사직하면서 올린 사직소에서, 그간 자신이 제시한 시무책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이제와서 경기도관찰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국권 수호의 방안으로 부일 매국적들을 단죄할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성상부터 크게 분발하시어 환도(環刀)를 가지고 서안(書案)을 찍고 일어나서, 먼저 나라를 팔고 정사를 어지럽힌 적신 5~6명을 잡아다가 저자에서 찢어 죽이고, 또 좌우에 벌여둔 진기한 노리개 등속을 모두 깨뜨려서 천하에 사사로운 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간특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각각 죄에 따라 벌 주거나 귀양을 보내소서. 그리고 나이 지긋하고 덕망 있는 사람을 뽑아 정부의 수반으로 두고, 어진 인재를 선발하여 여러 직책을 맡겨 성과를 책임지도록 하세요. 모든 정령 가운데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치게 하는 것은 낱낱이 제거하여 밤낮으로 선정을 베푸는 데 힘쓰세요.(<면암집>)
a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사진은 을사늑약문(복제품).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사진은 을사늑약문(복제품). ⓒ 권우성

면암은 두 달 여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 사정이 위급하여 충언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주위에는 이미 친일배측의 무리가 요직을 꿰차고 있어서 그의 상소나 시무책은 하나도 수용되지 않았다.


일제는 이같은 조정의 속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면암을 자신들의 거사에 방해 인물로 점찍었다. 하야시 곤스케 일본 공사가 자국의 외무내신 고무라 주타고에게 보낸 보고서이다. 

참정 최익현은 현재의 부패에 말려들지 않는 자로서 다소 청렴한 것으로 명망이 있는 자임. 오래도록 황제의 명이 있어도 응하지 않았는데, 이번 한국 황제의 간절한 소명에 따라 입경하여 알현하여 시폐를 극론하고 읍간하면서 오로지 시정개선의 실행을 강요하였지만, 기울어진 정계의 문란은 아무리 하여도 동씨의 주언으로서도 해결될 수 없었고 일반에서도 단지 근래에 없었던 괘언이라고 하면서 간과하였음. (주석 1)

이 시기 일제는 한국령 독도를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키고(1905년 2월 22일), 일본과 <통신기관 위탁에 관한 협정서>를 통해 통신원의 국제우편·전신·전화사업을 일본에 위임하여 통신권을 박탈하고(4월 1일), 일본 공사가 외국 주재 한국공사의 소환을 요구하고(4월 3일), 일본대표 가쓰라와 미국대표 태프트가 밀약을 통해 일본과 미국의 조선과 필리핀의 지배권을 인정하고(7월 29일), 러일전쟁의 마무리 수순으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갖는 정치·군사상 권리를 인정하는 포츠머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9월 5일)

일제는 갖은 수단과 방법, 외교력을 동원하여 대한제국을 먹어삼키려 들었다. 을사늑약을 강제하고자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면암이 거듭 상소를 통해 외로운 국권수호의 투쟁을 벌일 때 <황성신문>이 이를 보도하였다. 

근일 창정 최익현씨가 연로한 유재로 산림에 물러나 있다가 누차 부름을 받고 이르러 지난날 등대한 때에 민회와 전례로 힘써 연주하고 또 수차를 올리기를 무릇 만여언에(…) 이미 물러난 뒤로 사저에 돌아가지 않고 궐문 밖에서 황제의 명을 기다리다가 또 한 소를 계속하며 올린고로 그 소본과 비지는 이미 전보에 게재했거니와 대저 공의 강직은 성상이 인접한 바라. (주석 2)

일제는 면암의 민중과 유생들에게 미칠 영향력은 차단하고자 '입틀막'을 자행했다. 

73세(1905)에 경기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퇴하면서, 임금이 분발하여 나라를 팔려는 적신을 처형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상소로 왜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보낸 일병에 체포되어 왜군 사령부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고 사흘 만에 포천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상소문을 짓다가 일본 헌병대에 두 번째로 구금되었다가 사흘 만에 정산으로 귀가하였다. (주석 3)


주석
1> 박민영, 앞의 책, 138쪽.
2> <황성신문>, 1905년 1월 23일.
3> 금장태, 앞의 책, 21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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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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