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김민기 대표와 그의 어머니
김민기
나의 고향은 전남 완도의 외딴 섬 고마도다. 통통배를 타고 20여 분 물살을 가로질러 가면 포구가 나온다. 배가 포구에 닿으면 섬에 사는 형님이며, 형수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옷따, 옷따, 도련님 오시오?" 대학에 들어가고 처음 방문하던 때, 나는 무척 당혹하였다. 아직 사법고시도 보지 않은 내게 섬 주민들은 "황 검사님, 오셨네"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내가 독재체제의 하수인이 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던가?
섬 주민들의 호칭은 나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놨다. 죽고 싶을만큼 고통스러웠다. 돌아오는 통통배에서 나는 혼자 나직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냐. 저 깊은 바닷속에 홀로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1977년 12월에서 1978년 1월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나는 인천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을 자주 만났다. '똥물 사건'이 터졌다. 여성노동자들은 사측의 사주를 받는 남성노동자들의 린치와 폭력에 맞서야 했다. 옷을 벗었다. 브래지어도 벗었다. 팬티만 입은 채 여성들은 나체로 싸웠다.
그때 우리를 위로한 음악이 있었으니, <금관의 예수>였다. "오 주여, 지금은 어디에" 테이프를 틀었다. <공장의 불빛>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어요. ~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1978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어쩌면 2년 후 일어날 1980년의 항쟁을 예비한 한 해였는지도 모른다. 1978년 4월엔 광주의 북동성당에서 고구마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함평 농민들의 농성이 있었다. 1978년 5월에는 서울대 캠퍼스에서 대규모 시위가 터졌고, 이어 6월에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집결하여 함성을 질렀다.
다시 광주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한 것으로 연행당하고, 퇴직당한 교수들을 위해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학생과 조선대학생은 계림동으로, 충장로로, 도심의 거리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1978년 9월이었던가. 나는 대방동에 있는 야학에 출입했다. 그때 만난 야학의 청소년들이 무척이나 애잖았다. 나도 모르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입에서 나왔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눈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유인물 한 장 뿌리다 잡히면 징역을 사는 시절이었다. 긴급조치 9호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나는 서울의 산동네며, 캠퍼스며, 지하철이며, 다방에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그리고 입대했다. 대구 천위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대구 5관구 헌병대 영창에 감금돼 지옥의 영창 생활을 했다.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양산에 있는 제2 육군교도소에 수감됐다.
군 교도소는 민간교도소와 여러모로 달랐다. 민간교도소에서는 죄수들이 자신의 방에서 밥을 먹지만 군 교도소에선 대오를 지어 식당으로 걸어가 식사를 했다. 뜬구름만 봐도 이곳을 언제나 빠져나가나 가슴이 답답했다.
군 교도소는 빠삐용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밤이면 혼자 찬 마룻바닥에서 모포 한 장으로 잠을 잤다. 비가 오면 철창을 부여잡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노래를 불렀다.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 부모 병들어 늙으신 3년에 뒷산에 약초 뿌리 모두 캐어드렸지" 눈물은 하염없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1979년 7월 17일 출소했다. YH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했다. 그런데 농성 중이던 여성노동자가 추락했다. 고향이 광주인 그녀의 이름은 김경숙. 우리는 무등산 깊숙한 곳에 집결해 김경숙을 애도했다. 그때 <상록수>를 불렀다.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를 숨죽여 불렀다.
100만명의 합창